요즈음 부쩍 음식 먹을 때 사레가 자주 들려 괴롭다. 얼마 전부터는 침 사레에 물 사레까지 한다. 급하게 먹는 것도 아닌데 그렇다. 내 몸이 예전 속도에 따라가지 못하는 것이다.
칠팔 년 전쯤으로 기억하는데, 어느 회의 첫머리에 동석한 직원들을 소개하던 중 한 직원의 이름이 순간 떠오르지 않아 대충 얼버무리는 것으로 위기를 넘긴 적이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같은 상황이 오더라도 당황스러울 것 같지는 않다. 이제는 은퇴해서 긴장하게 하는 자리가 없어서기도 하지만 무엇보다 뇌와 입 사이에서 단어가 머물며 춤추는 그런 순간이 너무 자주 일어나 긴장 자체가 되지 않아서다. 가장 많이 대화하는 상대가 아내인데, 말할 단어가 떠오르지 않으면 ‘그거 있잖아’를 두세 번 반복하면 대개 해결된다. 아내도 뇌와 입 사이에서 단어가 머무는 연령대로 진입해 이심전심으로 알아듣기 때문이다.
이렇게 머리와 몸이 따로 노니 일상이 답답하기는 하다. 그래서일까. 마음속에서는 노여움, 편협함, 서운함이 더 단단하게 자리 잡은 느낌이다. 누적된 온갖 경험으로 무장한 백전노장의 눈에는 문제 해결의 실마리가 뻔히 보이는데 몰라주다니 하는 심리적 상태에 따른 것이 아닌가 싶다.
우리가 나이가 들면 눈과 귀가 어두워지고 이가 빠지는 건 다 이유가 있다며 누군가 우스개로 해준 말이 생각난다. 나이 들어 귀가 어두워지는 건 좀 적게 들어 서운함이나 노여움을 타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고, 눈이 어두워지는 건 대충 보도록 해 너그러워지도록 하기 위해서라는 것이다. 이가 빠지는 건 말하기 어렵게 하여 헛말이 나오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라는 대충 그런 내용이었다.
나는 들으면서 헛웃음을 짓기도 했지만 곱씹어 보니 공감이 갔다. 역발상(逆發想)의 해학이 숨겨진 지혜다. 내가 자주 사레 드는 건 천천히 먹으라는 신호고, 말할 단어가 떠오르지 않는 건 천천히 그리고 적게 말하라는 경고다. 한마디로 늙었으니 느리게 살라는 거다.
은퇴하고 시간 여유가 많아 집 주위를 매일 구경하듯 거닐고 서울 나들이도 자주 한다. 느릿느릿 걷다 보면 전에는 보이지 않던 것들이 제 모습을 드러낸다. 고궁의 숨겨진 처마, 꽃에 가려진 저만의 특색을 가진 잡초, 암벽의 아스라한 풀꽃 등등. 젊었을 때는 달리기 경주하듯 관람했던 미술관의 전시 작품에서는 이제 작가의 삶과 세상이 보이는 듯하다. 책을 읽든 글을 쓰든 그림을 그리든 좋아하는 일을 쉬엄쉬엄하니 떠오르는 게 많아 효율도 난다.
▲ 나는 가끔 집 근처 일산역 너머에 있는 재래시장에 들러 물건도 사고 시장통에 서서 군것질거리를 먹곤 한다. ⓒ 정승주
이처럼 느리게 살면 시간을 허비하며 사는 게 아니라 하루를 더 충만하게 사는 거라는 걸 나는 죽음을 의식할 수밖에 없는 육십을 훌쩍 넘긴 나이가 돼서야 비로소 깨닫는다. 어쩌면 느리게 살라는 건 경고가 아니라 하루를 알차게 사는 방식이자 내 나이의 특권일 수도 있겠다 싶다. 정호승 시인은 삶에서 ‘오늘’의 중요함을 강조한다.
“오늘이 중요합니다. 어제는 죽은 날입니다. 죽어버린 날에 머물러 있는 것만큼 어리석은 일은 없습니다.” (정호승 지음, <내 인생에 힘이 되어준 한마디>, 비채, 2006, 60쪽)
노년의 문턱에 서 있는 나로서는 과거에 미련을 가질 여유가 더더욱 없다. 정치인에게나 다들 특권을 내려놓으라 아우성치지만, 나에게는 누구도 그러지 않는다. 그래서다. 나는 느리게 사는 특권을 이용해 ‘오늘’을 자유롭고 충실하게 살려 한다.
은퇴 생활 초기에는 넘치는 시간을 주체하지 못해 바쁘게 뭔가를 하려 부산했는데, 지금은 느림을 즐길 수 있게 됐다. 공짜로 주어진 특권을 즐기지 않을 이유가 없고 장애물도 없다. 그럼에도 특권을 누리지 않는다면 그것만큼 어리석은 일이 또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