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론이나 자기계발론에서 벗어나야 하는 이유
살아낸 삶은 끊임없는 선택과 결정의 산물이다. 하루하루 무수하게 마주하는 일상의 소소한 흔적들조차 그렇다. 누구도 벗어날 수 없는 법칙이다.
나로 하여금 선택하고 결정하게 만드는 상황이나 맥락(context)을 회피하거나 저항할 수도 없는 경우가 많다. 어쩌면 삶이 묻는 방식인지도 모른다. 이 상황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나, 그래서 어떤 선택을 하겠냐고 말이다. 그 상황을 그저 받아들일 수밖에 없으면 대개 사람들은 운명이라 퉁 치며 자신을 합리화한다.
은퇴해 여유가 생기니 나는 가끔 지난 삶을 되새김질하며 그간의 선택을 곱씹어 보게 된다. 사회초년병으로 선택한 첫 직장에서 나는 1년을 버텨내지 못했다. 궁금한 것을 탐구하길 좋아하는 나에게 회사 생활은 애당초 맞지 않았다. 평생 다닐 생각을 하니 숨이 턱 막혔다. 다니려는 의지를 다지기도 했지만 소용없었다. 운명은 나를 퇴사하지 않을 수 없게 했다.
그래서 선택한 방편이 대학원 진학이었다. 대학에서 경영학을 전공한 나는 유달리 수학을 좋아했던 터라 한 대학원의 경영과학과 입학을 목표로 준비했다. 결과는 낙방이었다. 꼼짝 없이 재수해야 하는 상황이 되어버렸다. 회사 생활로 1년, 대학원 준비로 1년을 보냈는데 또다시 1년을 준비로 보내야 하는 절망스러운 처지로 내몰린 것이다.
그러던 어느 날 아우가 어디서 들었는지 자기 대학에 내가 준비한 과목으로 시험을 볼 수 있는 대학원이 있다는 정보를 알려주었다. 게다가 바로 지원이 가능하다는 것이다. 공교롭게도 낙방한 대학원의 시험일이 일반 대학교보다 2~3개월 일렀기 때문이다. 덕분에 1년을 허송세월하지 않아도 되는 새로운 상황이 생긴 것이다. 다만 내가 목표로 한 전공은 아니었다. 고민 끝에 나는 시험을 보기로 정했고, 대학원 진학에 성공했다. 애당초 계획했던 경영과학 분야에서 일할 수 없는 운명으로 바뀐 것이다. 결국 나는 원했던 경영과학 분야와는 영원히 결별하게 되었고, 졸업과 동시에 어느 연구기관에서 30여 년을 일하는 삶을 살았다.
내 인생에서 어찌할 수 없었던 상황은 또 있다. 내 허리디스크 파열이 그렇고 아내의 암 투병이 그렇다. 그것 역시 내 삶을 바꾸고 삶에 대한 내 태도를 바꾸게 했다. 인생에서 어찌할 수 없는 상황은 손꼽을 수 없을 만큼 많다. 누군들 그렇지 않겠는가.
이렇듯 인생은 내게 어찌할 수 없는 상황을 끊임없이 내보이며 선택과 결정을 강요했다. 그것은 인생이 나에게만 던진 상황이었고 스스로 해결하지 않을 수 없는 것들이었다. 그래서다. 내 인생을 나대로 사는 것 외에 방법이 있을까 싶은 것이다.
한 사람의 인생 안에서도 오늘의 삶이 어제와 다르고, 내일의 삶과도 다르다. 하물며 누군가의 인생이 내 인생과 같을 리 만무하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하루하루 쳇바퀴 돌 듯 사는 삶이라고 지겨워하거나 힘들어하기도 하고, 더 나은 방책이 없나 싶어 다른 인생과 견주어 보며 인생을 꾸려간다.
강신주는 자신의 책 <매달린 절벽에서 손을 뗄 수 있는가?>(동녘, 2014)에서 프랑스의 철학자 들뢰즈가 주장한 두 가지 종류의 ‘반복’, 즉 ‘동일자의 반복’과 ‘차이의 반복’이라는 개념을 사람의 걸음걸이에 비유해 설명한다. 걸을 수 있는 사람이 하는 모든 걸음은 동일한 걸음인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 동일한 걸음은 있을 수 없다는 것이다. 찰리 채플린의 뒤뚱대는 걸음을 흉내 낼 수는 있지만 똑같을 수 없는 것처럼 말이다. 그럼에도 인간은 관념적으로 걸음이라는 동일성을 만들어 내는 데 이를 ‘동일자의 반복’이라 하고, 반대로 한 개인이 자기만의 걸음걸이로 걷는 것을 ‘차이의 반복’이라 설명한다. 무엇보다 그는 ‘동일자의 반복’은 현실에서 존재하지 않는다는 점을 강조한다.
“모든 사람이 따라야 하는 걸음 일반, 혹은 걸음이라는 동일성은 실제로 존재하지 않고 단지 우리의 관념 속에서만 존재하는 겁니다. 가장 중요한 것은 모든 사람들이 자기 나름대로 걷고 있다는 겁니다. 이를 토대로 우리의 관념은 사람마다 차이 나는 걸음의 고유성을 제거하고 걸음이라는 동일성을 만들어 낸 것이지요.” (63~65쪽)
걸음걸이와 마찬가지로 인생 또한 같지 않나 싶다. 강신주의 표현을 빌려 말하면, 모든 사람이 살아내야 하는 인생 일반, 혹은 인생이라는 동일성은 실제로 존재하지 않고 단지 우리의 관념 속에서만 존재하기 때문이다. 흔히 사람들이 ‘그래봐야 인생이 다 그렇지’, ‘부자든 가난하든 행운과 불행을 겪는 것은 비슷해’하고 말하는 걸 보면 그런가 싶기도 하다. 그렇지만 실제 모든 사람은 다른 사람과 차이가 나는 인생을 산다.
그런데 다른 인생이 멋있고 좋아 보인다고, 성공할 수 있을 것 같다고 흉내 내면 어떻게 될까. 다시 강신주의 표현을 빌려 말하면, 누군가의 인생을 흉내 내는 순간, 우리는 인생을 제대로 살지 못하게 될 것이라는 게 내 생각이다.
“이제 들뢰즈가 구분한 두 가지 반복이 무엇을 가리키는지 분명해집니다. 다른 걸음걸이를 흉내 내는 것이 ‘동일자의 반복’이라면, 자기만의 걸음걸이를 걷는 것이 바로 ‘차이의 반복’에 해당할 테니 말입니다. 누군가의 걸음걸이를 흉내 내는 순간, 우리는 제대로 걷지 못하게 될 겁니다. (중략) 자기만의 차이를 실현할 수 없다면, 우리는 항상 남을 흉내 내는 위험에 노출될 수밖에 없으니까 말입니다.” (65쪽)
▲ 모든 단풍나무는 같은듯해도 서로 다른 빛깔을 낸다. 우리 인생도 마찬가지다. ⓒ 정승주
그런데도 사람들은 존재의 외로움 때문인지 욕망 때문인지 ‘동일자의 반복’이라는 관념에 쉽게 매여버리는 듯하다. 나만 하더라도 40대 시절 인생을 좀 더 잘 살려는 욕심에 인생론이나 자기계발론에 관한 책을 두어 권 샀었다. 세계가, 인생이 던져주는 상황 – 그걸 운이라 불러야 할지 인연이라 불러야 할지 모르겠지만 - 에 그것이 한 줄기 빛 같은 위안은 줄지는 몰라도 허상이란 걸 이제는 안다. 내 인생에서 내가 부딪친 상황은 오로지 나에게만 일어나는 고유한 사건이기 때문이다. 그러니 누구도 인생을 가르쳐줄 수는 없다. 이택광처럼 내가 인생론이나 자기계발론을 멀리하는 이유다.
““누구도 ‘인생’에 대해 가르쳐 줄 수 없다. 오직 우리는 삶을 살아낼 수 있을 뿐이다. 삶 자체에 충실한 것이야말로 ‘인생론’을 전복하는 ‘반인생론’의 봉기이다. 남이 가르쳐주는 ‘인생’을 살지 말라.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인생론이라기 보다 ‘새로운 생각’이다.” 이택광의 <인생론>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그러니 이제 자기계발서뿐만 아니라 ‘인생론’까지 버려야 할 것입니다. 이택광은 말합니다. “사실 ‘인생론’ 따위는 없다. ‘인생론’이라고 번역된 톨스토이의 저서는 오히려 ‘생명예찬’ 정도로 읽혀야 한다. 그는 인생에 대해 말했다기보다 삶을 살아가는 태도에 대해 말했다.”” (한기호 지음, <독서 100권으로 찾는 마흔 이후 인생길>, 다산초당, 2014, 98쪽)
북경의 나비 하나가 행한 날개 짓이 뉴욕에 폭풍을 불러오듯이 내 조그마한 선택이 내 인생 전체를 바꾸게 할 수도 있다. 대학원 시험 실패로 다른 대학원의 원하지 않은 전공을 선택하여 인생이 바뀐 나처럼 말이다.
내 인생은 온전히 내가 부딪쳐서 내는 길이다. 그 길이 어느 길도 아닌 새로운 길인 건 당연하다. 그래서 한 인생을 살아내는 ‘나’라는 존재를 불교에서 천상천하유아독존(天上天下唯我獨尊)이라 부르는 건지도 모르겠다.
노년을 코앞에 둔 이제야 인생이 끊임없이 던지는 물음에 남의 목소리가 아닌 내 목소리로 대답하는 것 외에 다른 방법이 없음을 느낀다. 요즘 부쩍 나만의 태도로 남은 생을 살아가야겠다고 다짐도 하게 된다. 마지막 기회마저 놓쳐 후회하고 싶지 않아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