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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서옹 Jul 12. 2024

선풍기와 여름나기

나는 에어컨 바람을 그닥 좋아하지 않는다. 많이 쐬기만 하면 영락없이 여름감기에 걸린다. 그렇다고 에어컨이 만들어내는 쾌적하고 선선한 공기를 싫어하는 건 아니다. 단지 바람이 싫을 뿐이다.

      

여름철에는 에어컨 바람을 피하는 게 내겐 제법 신경 쓰이는 일 중 하나다. 지하철을 탔을 때는 바람이 가능한 한 닿지 않는 지점을 설 자리로 정한다. 고속버스나 전세버스로 장거리 이동을 할 때면 좌석 위 에어컨의 통풍구를 닫는다. KTX 경우 바람이 나오는 창 쪽 좌석은 아예 예약하지 않는다. 식당에서도 에어컨 위치에 신경을 써 앉는다. 현역 시절 각종 회의 때에도 바람을 쐬지 않을 수 있는 자리에 앉으려 노력했다. 자리가 지정되어 있을 때는 풍향을 조절해 달라곤 했다. 그마저 여의찮으면 윗도리를 벗지 않았다. 한여름에도 내가 늘 겉옷을 챙기는 까닭이다. 

     

그럼에도 우리 집에는 에어컨이 2대나 있다. 원래는 거실용에 보조용(안방용)을 한 세트로 하는 에어컨만 있었다. 산 지가 20년이 넘어 전기 먹는 하마다. 그러다 2년 전쯤 큰 애가 지방 근무 때 샀던 에어컨을 서울로 근무지가 바뀌는 바람에 집에 들고 들어왔다. 작년 봄에 큰 애는 독립해 다시 집을 떠났어도 그 에어컨은 여전히 그 애 방 – 지금은 작은 애 방 - 에 있다. 

     

여름철이라도 우리집 에어컨은 여간해 돌지 않는다. 극심한 더위가 몰아치거나 열대야 때나 되어서야 에어컨 도는 소리를 들을 수 있다. 에어컨 바람을 싫어하는 나와 구두쇠 아내가 빚어낸 의기투합(?)의 결과다. 

     

살림꾼 아내의 지휘로 우리집만의 에어컨 트는 방식이 있다. 먼저 절전이 되는 애 방의 신형 에어컨을 튼다. 애 방의 문만 열어 두고 나머지 모든 방의 문을 닫는다. 이어 에어컨 바람이 거실로 스며들어 가게 하기 위해 애 방의 문 앞에 선풍기 1대를 두고, 다른 1대는 거실에 둔다. 마지막으로 거실 탁자와 편한 의자를 애 방에 배치하면 모두 끝난다. 


ⓒ 정승주

           

이 방식이 우리 가족에게 맞춤인 것은 에어컨을 좋아하는 아내와 작은 애, 그리고 에어컨을 싫어하는 나까지 모두를 만족시킬 수 있기 때문이다. 특히 아내와 작은 애는 방에만 머무는 게 아니라 거실에서도 독서나 게임을 한다. 지낼 만해서다. 나도 거실에만 머물지 않는다. 에어컨 방에서 잠깐씩 열을 식히면 몸이 개운해서 좋다. 에어컨을 틀지 않는 시기와 전기료 차이가 크게 느껴지지 않을 정도이니 금상첨화가 따로 없다. 

    

열대야가 있는 밤에도 같은 방식으로 튼다. 작은 애는 에어컨 방의 침대에서, 아내는 애 옆 바닥에서 잔다. 나는 애 방 입구에서 곁불 쬐듯 잔다. 

    

그런데 올해는 이 방식을 적용하는 데 있어 사소한 문제가 생겼다.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던 선풍기 모두가 작년 늦여름부터 이상징후를 보였기 때문이다. 한 대는 풍향 버튼이 고장나버렸고 다른 한 대는 모터가 문젠지 소음과 열이 심했다. 새 선풍기를 사야 하는 상황이 된 것이다.

      

더위 느낌이 살짝 들던 5월 초순, 선풍기를 사야지 하던 차에 궁하면 통한다고 처형네로부터 희소식이 들려왔다. 노는 선풍기가 많다는 것이었다. 저간의 사정은 이렇다.   

   

손위 동서는 작년 말로 정년퇴직했다. 기계에 조예가 깊을 뿐만 아니라 뭐든지 고치는 걸 즐기는 분이다. 분리수거 장소를 지나치다 내다 버린 선풍기들이 멀쩡해 보여 호기심에 집에 가져와 확인해 보니 어딘가에 하나씩은 고장나 있더란다. 동서는 하나하나 찾아 모두 고쳤다. 그렇게 고친 선풍기가 너무 많아 둘 곳이 없을 지경이 되어 버렸다는 것이었다. 


이때다 싶어 아내는 얼른 우리가 쓰겠다 했고, 그렇게 선풍기 5대가 거저 생겼다. 선풍기들을 켜보니 새것과 다를 바 없었다. 나는 방마다 한 대씩을, 그리고 거실에 하나 부엌에 하나를 배치했다. 그것으로 여름나기가 완벽하게 준비됐다. 


처형네가 여분이 더 있다길래 또 달라고 했다. 잡초 뽑으러 가끔 들르는 가평 땅 컨테이너에도 하나를 갖다 놓았다. 이 좋은 문명의 이기(利器)를 우리만 누릴 순 없었다. 지인들에게도 ‘나눔’ 했다. 

     

지금 나는 나만의 전용 선풍기를 틀고 시원한 바람과 함께 이 글을 쓰고 있다. 아내 역시 거실에서 전용 선풍기를 틀고 책을 보고 있다. 아들도 제 방에서 전용 선풍기로 열을 식히며 스마트폰 게임에 열심을 내고 있다. 새삼 동서가 고맙고, 선풍기가 고맙다. 기분 좋게 기지개를 켜고 있는데 아내가 목청 높여 부른다. 수박 먹고 해요~ 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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