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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서옹 Oct 20. 2024

아내의 분노

내가 사는 일산에는 호수공원이 있다. 너른 호수와 이름 모를 꽃들, 그리고 나무들이 어우러져 내는 풍광이 멋있어 자주 들른다. 산책하다 보면 프랑스 유학 시절의 아스라한 추억도 떠올라서 좋다. 

     

당시 우리 가족은 파리 외곽 크레떼이(Créteil)라는 곳에 살았다. 집에서 코닿을 거리에 있는 호수공원은 모양이 일산 호수공원과 닮았다. 프랑스 기억이 가물가물하다는 큰애가 호수공원만큼은 또렷이 기억난다고 할 정도로 우리는 공원에 참 많이도 갔었다. 머문 세월만큼 쌓인 추억의 아련함 때문인지 나는 이십 년이 넘도록 호수를 품은 일산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호수공원 안 어느 모퉁이에 장난감 집처럼 작은 도서관 하나가 있다. 안에 들어서면 오두막 느낌이 절로 날만큼 소박하다. 명칭도 어울리게 「일산 호수공원 작은 도서관」. 

    

아내는 이 자그마한 도서관과 십 년 가까이 연을 이어가고 있다. 독서 모임, 작가와의 만남, 글쓰기를 비롯한 각종 문화 특강 등 도서관 내 여러 프로그램에 지치지도 않고 참여한다. 가끔 나도 곁불 쬐듯 아내 따라 도서관 행사에 자의 반 타의 반으로 가곤 한다. 한번은 글을 쓰다 그린 색연필 그림 덕에 작은 도서관 앞 그림 전시회에 내 그림이 전시되는 영광도 맛봤다. 



 ▲ 「일산 호수공원 작은 도서관」 앞 그림 전시회에 제출했던 <도서관 전경> 그림. ⓒ 정승주


      

지난달 어느날, 거실에서 간만에 ‘나 홀로 영화’를 즐기고 있었다. 영화가 한참 클라이맥스로 치닫는 즈음 아파트 문 번호 키를 누르는 작동음이 심상치 않았다. 독서 모임에 갔다 돌아온 아내였다. 현관에 들어서자마자 아내는 겨우 참은 듯, 억누른 화를 쏟아냈다.  

    

“호수공원 작은 도서관을 없앤 데!”

“누가?”

“누가 누구긴… 시(市)가 그러지!”   

  

자초지종은 이렇다. 공립 작은 도서관은 시가 주는 보조금(연간 5천만 원 정도)으로 운영한다. 그런데 시에서 올해를 끝으로 호수공원 작은 도서관에 더 이상 보조금을 주지 않기로 방침을 정했다는 것이다. 이번 일로 아내는 고양시 관내에 공립 작은 도서관이 16곳이나 있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단다. 하지만 지난번 선거에서 당선된 현 시장이 취임한 이래 작년에만 이미 5곳에 보조금 지급이 중단되었고, 올해 말로 또 5곳이 추가된단다. 결국 내년에는 관내 작은 도서관이 6곳밖에 남지 않는다는 것이다. 

     

아내가 분노한 지점은 시에서 밝힌 보조금 중단 이유다. 2㎞ 내에 시립도서관이 있어 기능이 중복되는데 다, 도서 대출 건수가 줄어들어서라는 게 시의 설명이다. 한마디로 작은 도서관이 불필요하다는 것이다. 아내는 작은 도서관이 책만 빌리는 곳이 아니라 동네 주민의 문화공동체 역할도 갖고 있는 걸 시는 전혀 모른다고 개탄했다. 호수공원 작은 도서관만 하더라도 10개 가까운 동아리들이 운영되고 있다 했다. 폐관 방침을 접하고 독서 모임에 같이 참여하는 사람들이 엄청나게 분노했단다. 

     

한참 동안 전후 사정을 토해놓은 아내는 자기도 도서관을 지키는 데 작은 힘이나마 보태고 싶다 했다. 아내는 바로 실행에 옮겼다. 거실 의자에 앉아 노트에 무언가를 제법 길게 쓰더니 내게 건네주었다. 시 홈페이지 민원란에 올리고 싶다며 워드로 쳐달라 했다. 

    

그 후로 아내는 같은 뜻을 가진 사람들과 자주 모임을 가지는 듯했다. 간절하면 하늘도 돕는지 지난주에는 한 중앙 일간지에 관련 내용이 기사로 떴다. 그것도 단발성이 아니라 며칠 사이 서너 편의 기사가 연속으로 이어졌다. 그중 한 기사에 실린 호수공원 작은 도서관 이용 시민들 사진 속에 아내도 떡하니 있었다. 대중 앞에 나서는 걸 좋아하지 않는 아내가 단단히 화가 나긴 났나 싶었다.  

   

엊그제 아내는 반대 청원 서명지를 갖고 왔다. 나는 기꺼이 첫 서명자가 되었다. 아내의 ‘바램’이 이루어지길 바라는 마음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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