헐렁헐렁 날들은 가고
집에서 놀던 웃음이 뒤돌아본다
새벽, 혼자 깨어있는 금성은 멀다
흩뿌린 발자국들이 다가와서 앉는다
따뜻하던 겨울의 손바닥이 무릎을 만지고
귓불을 덥히던 말들이 손끝에 잡힐 듯 돌아다닌다
산 그림자 타고 놀던 철길
물빛 튀며 찬란한 강변
울멍울멍 왼 가슴에 흘러간다
다가오는 아지랑이 한 뭉치를
끌어안으면
짐승처럼 낮다
영혼이여 그리움 앞에서
오페라의 줄거리는 통속적이다. 운명의 주인공들이 사랑의 순간과 그 종말 앞에 고뇌하고 좌절하면서
절절한 아리아를 토해낸다.
우리의 삶은 얼마나 통속적인가? 순간의 사랑에 목숨을 걸고 바람난 가족의 이야기는 길거리에 넘쳐난다. 모두들 패거리를 이루어 싸우러 다닌다.
전쟁 중이었다. 남으로 가는 피난 열차 안이다.
모두들 앞날에 대한 불안과 시시각각 닥쳐오는 공포로 심신은 피폐해 벼랑 끝에 선 것 같았다.
어느 누구도 말하는 이가 없다. 옆 사람의 숨소리조차 크게 들리는 적막의 한 순간, 어디선가 가느다랗게
현을 긋는 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누군가 한쪽 구석에서 바이올린을 켜기 시작한 것이다.
날카로운 돌에 간단없이 찔리는 심장 위로 부드러운 손길이 얹힌다. 찌푸린 사람들의 표정이 서서히 풀리고 잊고 있었던 미소가 빙긋이 돌아온다.
평안도의 어느 초겨울이다. 중국인 집 처마 밑에 사람들이 비를 피하기 위해 몰려들어 있다.
갑자기 쏟아진 비라 길을 떠나면서 채비를 못한 사람들은 섣불리 나서지를 못한다. 차가운 비바람이
몰아칠 때마다 움츠러들며 점점 불안하다. 이때 험악한 얼굴의 중국인 주인이 나타나 사람들을 한번
훑어보곤 사라진다. 무슨 일이 곧 벌어질 것만 같아 더 어석버석해진 사람들 앞에 얼마 후
그가 다시 나타났다.
손에는 김이 모락모락 나오는 주전자와 찻잔을 들고..... 물 한 모금씩을 받아 마시며
사람들은 비로소 몸이 풀리고 길 떠날 준비를 하는 것이다.
노년의 사내는 홀로 살고 있다. 내일이면 요양시설에 보내진다.
치매에다 관절염, 또 다른 노경의 질병들로 홀로 버틸 수 없기 때문이다. 적막한 한밤중 누군가
그의 방문을 두드린다. 이웃의 아는 여자다. 그녀가 그를 끌고 간 곳은 영업을 마친 아무도 없는 콜라텍.
한때 유명한 주먹이었고 춤꾼이었던 사내는 만감이 교차하는 얼굴로 절름거리며 몸을 움직이고
그런 그의 청춘을 여자는 포근히 감싸 안는다.
가장 아름다운 한밤의 무도회가 펼쳐진다.
오랜 세월이 흘러 이제는 서로 결혼기념일은 잊어버리고 살아간다.
그날이 되면 어제까지와는 다른 어떤 눈빛이 슬쩍 스치는 것을 보기는 한다. 외출에서 돌아오는 길에
시클라멘 화분 하나를 사서 베란다에 두었다. 결혼기념일이었다. 그러고는 또 잊고 있었다.
며칠 뒤에 보니 꽃은 시들지 않고 싱싱하게 빛이 나고 있다. 아내가 나 몰래 물을 주고 있었다.
통속의 한 복판에서 우리는 오늘도 절름거리며 춤추듯 길을 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