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몰랐어요

by 석정호



입을 찢을 듯이 웃는

저녁 달이 나를 맞아줍니다

시위를 당기던 짐승이

쓰윽 이빨을 닫아요

수많은 퇴근에도 저 달이

거기 있는 줄 몰랐어요


어느 언덕에 혼을 다 주고

밤마다 사라지는 애인보다

숲의 가로등이 곱게, 웃어요

새 애인이 되려나 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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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원에는

사람들이 오가고

나뭇잎과 꽃들이 계절을 따라 오가고 새들도 그러는데

나는 몰랐어요

물새 두어 마리 떠 있는 물가에 누워

스스로 못나서 잘못 들어선 길들이

지르는 비명을 듣습니다

왜그랬을까요

작은 몸으로 돌아온 나는

이렇게 작아져서야 더 큰 품에 안길 수 있음을

정말 몰랐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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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우의 언덕



혜숙이 가방을 들고 가을 들판을 걸어가고 있었다.

두근거리는 가슴으로 나도 멀찍이서 따라갔다. 보름날 밤이면 대낮같이 훤한

달의 숨결이 방 앞까지 찾아와 나를 불러내어 치렁치렁한 달빛을 밟으며

마당으로 나서면 왠지 모를 그리움과 안타까움으로 가슴이 아렸다.


나는 경주에서 삼 십여 리 떨어진 시골 마을에서 시내까지 통학하며 중학교엘

다녔다. 첨성대, 지금은 월지라고 불리는 안압지, 반월성 곳곳에서 놀았다. 안압지엔

수양버들이 연둣빛 꽃눈이 그렇게 아름다울 수가 없었다. 수양버들 늘어진 나뭇가지

아래로 팔뚝만한 잉어들이 설렁설렁 돌아다녔다.

볕이 선선한 가을날, 반월성 언덕에서 이광수의 ‘무정’과 ‘흙’ 을 읽었다.

책에 빠져 읽다가 고개를 들면 바람은 부드럽게 불고 달콤한 책의 내용과

가을의 고성이 풍기는 고즈넉함, 알 수 없는 황홀함에 젖기도 했다. 그럴 때면

얼굴이 뜨겁게 타오르기도 했다. 정신없이 읽다가 돌아갈 차 시간을 놓칠 뻔한 적도

여러 번이었다.


경주 남산의 절골에 큰고모가 살았는데 방학이면 자주 놀러 갔다. 사촌 형을

따라 남산 정상에 올라갔다 오기도 했다. 산의 등성이를 오르내리다 보면 곳곳에서

불쑥불쑥 목이 없는 부처가 나타나기도 하고 소나무 가지 사이로 바위에 새겨진

마애불이 내려다보고 있기도 하고 방문 앞에 하얀 고무신 두어 켤레 놓인 암자가

나오기도 했다.

동방 역에서 기차를 내려 절골까지 걸어가다 보면 서출지가 나오는데 어릴 때

들은 그곳에 관한 이야기는 무서웠다. 쥐와 까마귀, 돼지가 나오고 왕을 죽이려고

간부와 숨어있던 왕비는 왕의 화살에 맞아 죽는다는 이야기, 가장 가까운 사람의

배신과 불륜은 어린 마음에 컴컴한 뒷간같이 음산했다.


훗날 나는 장옥관 시인의 ‘가오리 날아오르다’라는 시를 보면서 머릿속이 반짝

빛이 일어나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항아리에 차오르는 달빛이 봉우리까지 담겨들면/산꼭대기에 납작 엎드려 있던

삼층석탑 옥개석이 주욱, 지느러미 펼치면서/저런 저런 소리치며 등짝 검은 가오리

솟구친다/. . . // 달밤에 천 마리 가오리들이 날아다닌다...’

만월의 남산에서 삼층석탑이 가오리가 되어 하늘로 날아오른다는 것이다.

달밤의 남산 일대는 깊은 바다가 되고. . .

이 신비로운 상상을 얻을 만한 곳이 과연 경주 남산이라는 생각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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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향은 추억의 저장고다. 추억은 점점 시들고 말라가는 꽃나무에 물을 뿌린다.

여우도 죽을 때는 태어난 언덕을 향해 고개를 뉜다고 했던가? 티 없이 맑고 순수한

영혼이 깨금발로 뛰어다니던 골목길이 아직도 나를 기다리고 있을 것만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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