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과를 전공했지만 철학에도 그다지 흥미를 느끼지 못했고 점수가 좋을 리 없으니 결과적으로 철학 쪽과는 점점 멀어졌다. 하지만 성인이 되고 여러 인문학 서적들을 접하면서 이제는 철학이 그렇게 공감되고 재미있을 수가 없다.
짐작건대 그때는 아직 온전히 철학을 가슴으로 받아들일 수 있는 시기가 아니었다는 생각이 든다.
삶의 쓴맛과 단맛 그 다양한 맛을 경험한 후에야 오는 공감의 문이 뒤늦게 열렸지만 그 영향은 결코 작지 않았다.
철학 책을 접할 때마다 내면의 바다에 크지도 작지도 않은 잔잔한 파도가 일렁대는 느낌을 받는다. 잔잔한 파도 위 반짝이는 불빛을 향해 파도에 몸을 맡긴 채 유유히 떠다니는 돛단배처럼 주변의 고요함이 느껴지는 것도 같다.
얼마 전 쇼펜하우어의 책을 읽었을 때 여러 차례 니체가 등장했다. 둘은 플라톤의 이원론과 그에서 비롯한 기독교의 이성 세계와 신을 부정하고 인간의 의지를 그 주인공으로 등장시켰다는 공통점을 가지고 있지만 쇼펜하우어가 그 삶의 의지를 본능적인 욕망으로서 부정하고 없애려는 반면 니체는 그 의지를 부정하지 않고 이를 맞서 극복해야 할 대상으로 보았다는 점에서 뚜렷하게 구분된다.
그때 문득 이 니체라는 철학자가 궁금해졌다.
결론적으로 쇼펜하우어의 철학은 맹목적인 의지를 부인하며 삶에 대한 비관으로 나아간 '수동적 허무주의'라면 니체는 더 많이 원하며, 더 강해지기를 원하는 힘에의 의지를 추구하여 신의 죽음으로 인해 다가오는 허무주의를 극복하는 '능동적 허무주의'다. 이런 힘에의 의지는 단순히 살아남기 위한 의지가 아니라 삶과 맞서 싸우고 새로운 삶을 창조하는 원동력이다.
40을 맞은 인생에서 어쩌면 이제껏 보고 경험하였기에 바뀔 수 없는 게 많다는 것도 무언가를 바꾸기 위해서는 적잖은 에너지가 필요하다는 것도 잘 알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남은 인생을 잘 살기 위해 이를 인생의 전환점으로 삼아 자신을 돌아보고 잘 정비하느냐 아니면 안전하게 해 왔던 방식 그대로 고수해 똑같은 삶을 반복하느냐를 이제는 선택해야만 한다.
어떤 선택을 하든지 그건 우리 각자의 책임이다.
하지만 뻔히 예상되는 결론을 무시한 채 나아간다면 그거야말로 자신의 인생에 대한 부정이며 용기 없음의 반증이 아닐까 싶다.
구구절절 공감되는 아포리즘이 너무도 많아 밑줄을 치고 다시 봐야지 했던 구절이 다시 첫 장부터 넘겨보니 책의 대부분을 차지할 정도로 많았다. 분명 다른 시대를 살다 간 이의 격언인데도 이토록 의미 있게 다가오는 걸 보면 인간의 삶이란 크게 다르지 않다는 보편적인 사실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다른 철학자들의 언어가 마치 외워야 할 공식처럼 느껴졌다면 철학자 니체의 언어는 마치 내 안의 나를 찾게 해주는 보물 지도처럼 느껴졌다. 항상같은 자리에 있었지만 늘 주인에게 외면받아온 내 내면 속으로 들어가 마치 나만 찾을 수 있는 보물을 발견하도록 도와주는 것만 같았다.
니체가 말하는 힘에의 의지가 궁극적으로 지향하는 초인의 삶을 나는 과연 달성할 수 있을까?
고통에 놓일수록 피하지 않고 행복을 위한 당연한 수순으로 인식해 당당히 맞서 싸워 극복할 수 있을까?
외로움에 주춤하지 않고 고독을 즐기며 스스로 긍정하고 앞으로 나아갈 수 있을까?
죽음을 막연히 두려워하지 않고 기쁘게 받아들이며 현재를 더 소중히 하고 의미 있게 살아갈 수 있을까?
사실 권태기, 번아웃, 트라우마 등등 눈으로 보이는 현상에만 집중하고 도망치느라 근본적인 나의 욕망을 잘 살피지 못했다. 사회에서 도태될까 두려워 남들의 기준과 시선에 나를 맞추고 변화시키려고 부단히 애를 썼다.
그래서 지금 만족하는가?
그래서 지금 행복한가?
보이는 것만 중시하다 보니 정작 나를 살피는데 소홀했다. 주변에 나를 맞추려 하다 보니 시시각각 변하는 외부의 욕망은 끝이 없었다. 그 해답을 늘 외부에서 찾았더니 어느새 스스로가 탈진해 있음을 알았다. 하지만 알아차렸을 때 이미 몸과 마음이 회복하기엔 여력이 없음을 느꼈고 이내 포기하고 다시 세상과 타협하기 시작했다. 그저 몸만이라도 그 소속감이 주는 따뜻함에 의지하고 싶었던 것 같다.
이 책을 읽고 알았다. 나는 현재보다 지나간 과거와 다가올 미래에 더 많이 살고 있었다는 것을.
언젠가부터 오늘 현재를 열심히 살아내는 것보다 지나간 과거에 대한 후회와 다가올 미래에 대한 불안으로 스스로를 몰아가고 있었다는 것을 알았다. 이제라도 잘못 인식된 좌표를 지금 여기로 끌어와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눈앞에 보이지 않는 것을 쫓기에 인간을 다른 동물과 뚜렷이 구분되는 고등 동물로 인식하지만 과연 이 특별함이 좋은 것일까. 기억보다 망각의 중요성을 언급한 니체의 말처럼 꼭 잘 기억해야 행복한 것이 아님을, 망각으로 빈자리를 내주어야 비로소 새로운 기억이 들어설 수 있음에 공감한다.
지금 현재에 집중하면서 이미 꽉 채워진 기억의 주머니를 조금씩 덜어내려는 노력을 해봐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