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징어게임 3 속에 나오는 이병헌 배우의 대사다. 아직도 사람을 믿냐는 짧지만 강한 한마디. 시리즈를 끝냈지만 그 말이 남긴 깊은 여운이 계속해서 내 머릿속을 맴돈다.
사람을 믿는다는 건 순전히 내 의지로 가능한 줄만 알았다. 남들이 아니라고 말해도 나는 이겨낼 수 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누군가를 믿는다는 게 이렇게도 어렵다는 걸 이제야 깨닫는다. 그리고는 많은 이들이 내는 같은 목소리에는 분명히 그 이유가 있다고 끄덕이기 시작했다.
결혼생활 내내 남편은 내게 거짓말을 했다. 나를 해하려 한 거짓말이 아니라는 것은 안다. 목적은 그러했지만 결과적으로는 내게 많은 상처를 남겼다. 눈에 보이는 상처는 치료도 하고 그래서 새살이 돋지만 문제는 보이지 않는 상처다. 나도 모르게 깊이 파인 상처가 느껴지기 시작할 때 그때가 무섭다. 그 시작이 어디부턴지 그 깊이가 어느 정도인지 알 수 없기에 막막하기만 하다. 어딘가 있을 출구를 향해 힘껏 손을 뻗어 더듬어보지만 무언가 잡히지 않아 무섭고 또 무언가 잡혀도 무섭다.
그렇게 나도 모르게 그 존재감을 드러낸 불안이라는 녀석은 또 다른 나를 대변하듯 내 몸을 함께 나누어 쓴다. 예전이라면 의식되는 즉시 부정하기 일쑤였지만 이제 그 존재를 인정하기로 했다. 함께하는 것이 숙명이라면 받아들이기로.
지금은 열심히 사는 남편의 뒷모습을 보며 두 가지 감정이 동시에 든다. 지금 그의 모습은 진실일까 혹은 거짓일까. 나는 믿기로 이미 마음을 먹었는데 나의 또 다른 자아인 불안이는 여전히 믿지 못하나 보다.
그의 표정과 눈빛 그리고 행동을 살피며 지난날의 단서를 끄집어내 기어코 비교해 본다. 불안이 한 테 지지 않을 정도의 믿음이 생겨나자 그제야 그만두기로 한다.
다시 한번 믿어보기로 하자.
나에게 실망을 줄까 봐 무서워서, 내가 헤어지자고 할까 봐 무서워서 도망치듯 거짓말한 그를 용서하기로 했다. 목적이 수단을 정당화할 수 없듯이 이유야 어찌 되었든 거짓말은 안되었다. 하지만 가정을 지키기 위해 난 그 거짓된 수단일지라도 껴안기로 했다. 소각해 버릴 수도 없는 상처지만 보이지 않는 저 깊은 마음속 바다 어딘가에 묻어두면 괜찮겠거니 했다. 그렇게 잊고 살면 언젠가 바다와 한 몸이 되어 바다가 될 줄 알았다.
아직도 사람을 믿습니까?
이 말 한마디가 내 깊은 바닷속 상자를 길어 올렸다. 그전부터도 계속해서 의식되었지만 애써 잊고 있었던 봉인된 상자가 물과 하나가 되기는커녕 조금씩 떠오르고 있었다. 돌을 묶고 또 묶어 떠오르지 못하게 하고 싶은데 쉽지가 않다.
늘 남들에게 비치는 나를 의식하며 살아왔는데 요즘따라 내 마음속을 들여다보는 나를 본다. 안쓰럽기도 하고 대견하기도 한데 그럼에도 잘하고 있다고 스스로를 위로한다.
이 출렁이는 감정의 바다가 언젠가는 잠잠해지겠지. 자연의 순리는 거스를 수 없음을 인정하며 그 품에 살짝 기대어 보기로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