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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마루 Dec 14. 2022

글자를 놓친 하루

어느 시인의 시집을 받고

정진하기를 바란다는 문자를 보낸다는 것이

'ㄴ'자를 빼먹고

정지하기를 바란다고 보내고 말았다

글자 한 자 놓친 것 때문에

의미가 정반대로 달라졌다

'ㄴ'자 한 자가 모자라

신이 되지 못한 시처럼


정진과 정지 사이에서

내가 우두커니 서 있다


천양희 詩 <글자를 놓친 하루>






유독 꿈이 어지러운 날이 잦다.

특히 숫자와 관련된 꿈이 그러한데,

꿈에서 비밀번호를 누르거나

동전을 센다거나

전화를 걸려고 번호를 누를 때

매번 숫자가 맞지 않아 애를 쓰다가

너무 힘들어서 잠에서 깬다.


꿈 해몽의 영역은 내 몫은 아니지만

짐작해 보건대, 내 무의식에선 내가

제대로 된 항로에서 조금 벗어나 있다고

생각하듯하다.

맞추려고 무던히 애를 쓰는데

아귀가 맞지 않는 느낌이랄까.


요즘 글에 대해서 많이 생각한다.

써지면 쓰고, 안 써지면 읽기만 하고

오랜 세월 그래 왔는데

새삼 글로써 성공해 보겠다는 의식은

단 한 번도 꿈꿔 본 적 없는데,

내 무의식은 그렇지 않은 걸까.


글을 쓰는 일이

커다란 바위를 깨는 일처럼

고되고 아프게 느껴질 때가 있다.

돌에서 글자 한 획을 끌과 망치로

깨부수며 의미를 만드는 것이

점점 힘들어진다.

대충 막 만들어 내고 싶지는 않은

재주 없는 기술자는, 돌을 깨면 깰수록

파편에 맞아 아프기만 하다.


글을 쓰는 나는 난파당한 다.

쓰는 生의 배가 어디로 흘러가든

그 속에 몸을 싣고 일생을 연하게

흐르고 싶었는데,

물이 흔들리는 것인지

배가 흔들리는 것인지 가끔

마음이 요동치며 서러울 때가 있다.


나는 누구에게도 길을 묻지 않았다.

스스로에게 질문을 던지고

나의 내부에 오래 귀기울이는 것으로

충분하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을 써야 하는 내 마음속 我가

을 닫아걸고 골방에 돌아 누웠다.

쓰면 쓸수록 고독해져서

'그까짓 것 쓰고 싶지 않다' 한다.

그리고 '혼자에게만 의미 있는 글을

공해처럼 이곳에 쏟아내는 이유는

무엇인가' 묻는다.




불가에서는 좌선이라는 정지를 통해

용맹정진으로 나아간다지?

정진까지는 아니더라도

정지에서 한 걸음씩 움직일 수 있다면...


'ㄴ'이 빠져 '정지하기를 바란다'는

문자를 받은 시인은 정신이 번쩍 

들었을 테지?

내게도 누군가가 'ㄴ'이 빠진

글자를 보내줬으면...



#천양희   #글자를 놓친 하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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