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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마루 Dec 28. 2022

새벽 전화가 울리고 나는 첫 기차를 탔다

새벽에 울리는 전화벨 소리만큼 불길한 것은 없다.

내가 공무원이 되어 서울로 떠나는 것을 동네 사람들은 부러워했지만, 엄마는 어땠는지 모르겠다. 처음으로 자신의 품을 떠나는 딸에게 늘 그랬던 것처럼 덤덤했다. 서울로 올라온 후 일주일이 다 되어 갈 동안, 삼촌 집은 지낼 만한지 일은 힘들지 않은지 안부 전화 한 통 없었다. 직장에 적응하느라 바빴지만, 첫 휴일을 맞아 내가 먼저 전화를 넣었다. 전화기 옆에 있었던 듯 전화벨이 한 번 울리자마자 바로 엄마가 받긴 했다. 엄마와 나는 보통의 모녀 사이처럼 친밀한 사이가 아니었다. 동생처럼 밖으로 나돌아 다니는 아이도 아니고, 늘상 뭘 하는지 자기 방에 처박혀 있고 엄마의 말에 따박따박 대꾸하는 딸이 못마땅했을 수 있겠다고 지금은 생각한다. 누군가에게 큰딸은 작은딸처럼 편하지 않다고 말하는 것을 직접 듣기도 했다.


무엇을 타고 집으로 가야 제일 빠를까, 생각했다. 그때 첫 비행기와 첫 새마을 호는 너무 늦게 있었다. 차 시간을 우두커니 기다릴 수 없었던 나는 그 시각 서울역에서 부산으로 가는 첫 기차를 탔다. 아마도 오전 6시 언저리에 출발하는 통일호였던 것 같다. 집과의 물리적 거리를 좁히기 위해서 통일호가 아니라 자전거라도 타야 했다. 기차는 느렸지만, 그동안 엄마와의 시간을 반추하는 데는 너무 빨랐다.


  내가 집을 떠나고 맞는 두 번째 휴가를 본가에서 보내고 서울로 올라갈 때, 평소와 다르게 엄마는 버스정류장까지 배웅을 나왔다. 나는 육교를 건넜고 엄마는 맞은편에서 가만히 바라보고 있었다. 곧 버스가 도착해서 나는 손을 흔들어 주고 탔다. 버스 창 너머로 그대로 서 있는 엄마를 본 것, 그것이 내 기억 속 마지막 엄마의 모습이다. 그 후, 6개월 만에 엄마가 위독하다는 전화를 새벽에 받았다. 새벽부터 오전 내내 엄마 곁으로 데려다 줄 무언가를 바꿔 타면서 도착한 집에는 상중임을 알리는 등이 걸려있었다.


한바탕 슬픔이 휩쓸고 간 후 소강상태를 보이던 집에 서울에서 딸이 도착했단 소식이 들리자, 그곳에 모여있던 사람들은 다시 슬픔의 격랑 속으로 빠진다. 그렇게 큰 딸의 눈물에 그들의 눈물이 얹어져 큰 파도의 이랑을 넘고 나면 또 슬픔은 잔잔해지고 각자가 저장하고 있던 망자와의 기억을 풀어놓는다. 며칠 동안 그런 형태가 반복된다. 상갓집은 특유의 분위기가 있다. 슬프지만 매분 매초 눈물만이 그곳을 지배하지는 않는다.


그때 아버지는 지구 반대편에 계셨다. 하필 남미의 칠레에. 아마도 외삼촌이 아버지 회사에 전화했을 테고 회사에서는 아버지가 계신 곳으로 전화 계주가 펼쳐졌다. 마지막 주자인 아버지의 목소리가 전화기 너머에서 들리자마자 또 그 슬픔의 풍랑이 몰아친다. 직항이 없어서 비행기를 몇 번 바꿔 타야 했고 3일째 밤, 물속처럼 슬픔이 조용해질 때 아버지는 지구 반 바퀴를 돌아 초췌한 모습으로 오셨다. 또 한 번의 너울이 치고 난 뒤에 본 아버지는 맨발이었다. 양말도 신지 못하고 허겁지겁 비행기를 대여섯 차례 바꿔 타고 오신 것이었다.


  엄마의 장례와 삼우제가 끝나고 아버지, 나, 동생 이렇게 셋만 덩그러니 집에 남았다. 엄마를 그리워할 시간도 없이 나는 곧 서울로 가야 했고, 아버지는 또 지구 반대편으로 가야 했다. 각자 홀로 떨어져야 할 우리는 서로를 릴레이식으로 배웅했다. 서울로 향하는 나를 혼자 보낼 수 없는 아버지와 동생은 함께 서울행 기차에 올랐다. 셋이 기차를 타는 건 처음이었다. 새마을 호를 타고 서울로 가는 4시간여 동안 슬픈 이야기는 입 밖으로 꺼내지 않은 채 웃으며 여행했다. 나를 서울 삼촌 집에 떨궈주고, 아버지와 동생은 다시 부산행 기차를 탔다.며칠 후 아버지가 일터로 돌아가야 할 시간에는 대학생이 된 동생을 돌봐주기 위해 우리 집으로 들어온 고모와 동생이 부산에서 배웅했고, 김포공항에서 비행기를 타는 아버지를 서울에 있던 내가 다시 배웅했다. 우리는 각자 있어야 할 곳에서 하나의 빈자리를 가슴에 품은 채 씩씩하게 시간들을 흘렸다.


울타리를 벗어나 새로운 세상으로 향하는 나의 뒷모습을 엄마는 어떤 마음으로 바라봤는지 영원히 알 수 없다. 뒤돌아설 수 있는 모습을 준비하지 못한 채 엄마를 보냈지만, 분명한 것은 지금 엄마가 계신다고 해도 나는 여전히 나로 남아있고 엄마는 여전히 그 모습의 엄마로 남아있을 테다. 결코 고칠 수 없는 뚝뚝함으로 따뜻한 말 한마디 건네지 않을 테지만, 항상 떠난 이와의 승부에서는 남아있는 자가 패배하기 마련이다. 그 패배는 시간이 흐르면 흐를수록 더 큰 그리움이라는 내상으로 남는다.


정한은 인생이란 긴 항해에서 뉴스라고 할 것도 없는 일상이지만, 오십도 채 못되어 떠난 엄마의 나이와 비슷해질 무렵부터 내 마음속에 천수답 하나가 터를 잡았다. 아무리 물을 대도 젖지 않는 이랑처럼 도시 치유되지 않는 오래된 슬픔, 그게 요즘 들어 새삼 저리고 아프다.

 

그날, 집으로 달리는 기차 안에서 '먼 훗날 나는 이 장면을 기억하게 되리라, 시간이 지날수록 점점 더 선명해지리라'라고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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