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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마루 Apr 05. 2023

길에서 느끼는 생의 감각


작년 이맘때 허름한 계단 구석에 피어있는 민들레에 대해 글을 쓴 적이 있다. 올해도 그곳을 지날 때마다 계속 눈길을 주는데 아니나 다를까 민들레가 작년보다 더 의연하게 피어있다. 시멘트 구조물 속에 핀 민들레에게 왜 이렇게 연연이 대견스러움이 드는 것인지, 생각한다. 바람이 살랑인다. 따뜻한 봄날의 태양을 닮은 민들레와 눈을 맞춰 본다.


'나는 살아 있다'는 온전한 기쁨을 매분 매초 느끼는 사람이 있을까. 사람은 그저 살아가거나 살아진다. '살아 숨 쉬고 있다'는 당연한 증명이 너무 익숙해서 오히려 생의 감각을 느끼지 못했다. 평평범범한 일상과 안전한 것만 추구하는, 늘상 집안에만 틀어박혀 있는 내가 스스로 생각하기에도 염려스러울 지경이라 걷기를 시작한 지 일 년이 다 되어간다.


아파트 주변을 걷기도 하고, 차를 타고 멀리 나가기도 한다. 강가를 걸을 때도 있고, 숲길을 걷을 때도 있다. 도시를 걷기도 하고 한적한 시골길을 걷기도 한다. 그곳에서 만나지는 모든 것들을 보고 들으면서 내가 살아있다는 것을 올곧게 감각한다.




처음엔 조금씩 걸었지만 이제는 하루에 10킬로미터쯤은 거뜬히 걷는다. 걷기 시작할 때는 백만 가지 생각이 머릿속에서 수군거리다가도 숨이 찰 때쯤이면 오로지 걷기에만 집중된다. 한 순간도 생각이 머리에서 떠나지 않는 사람이 오직 발걸음에만 집중하는 생경스러움에 놀라고 있는 중이다. 말랑거리던 종아리엔 근육이 붙었고, 흐늘거리던 마음도 딴딴해지는 것 같다.


걸을 때는 당연한 것들이 변한다. 시간관념도 공간의 개념도 달라진다. 나에게 올 것은 기다리지 않아도 올 것이고 떠나가는 것은 붙잡아도 가는 것인데, 비빌 언덕도 없이 혼자 동동대던 마음이 어느새 많이 누그러지고, 오로지 땅을 딛고 있는 든든한 두 다리와 길에서 듣는 리, 눈앞에 보이는 풍경들만 감각하게 된다. 몸은 지치지만 마음은 점점 더 가벼워지고, 체온은 올라가지만 잡념들은 내려간다. 몸을 움직여 걷는 것이 무기력했던 감각을 조금씩 깨어나게 하는 것이다. 인간은 움직이게 설계되었다는 말이 맞는 말인 것 같다.


돌이켜보니 나는 미래의 일은 전혀 생각하지 않았다는 것을 깨달았다. 어릴 때부터 장래를 생각하면 태곳적 일처럼 멀게만 느껴졌었다. 그래서 매일매일 그날그날의 일만 생각했고, 걸어온 길이 길어진 어느 순간부터는 자꾸 뒤를 돌아보게 되었다. 그래서 생은 내게 벅차고 슬픈 존재였다. 이제 젊지 않은 나이가 되어서야 마침내 미래와 시간을 소중하게 여겨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도시의 시멘트 계단 틈 사이에서 핀 민들레 한 송이가 생의 감각을 다시금 흔들어 준다. 마른 세상에서 힘을 내자고 들고 있던 생수를 나눠 마셨다. 물 한 모금에  나도 민들레도 생기가 돈다. 남은 시간도 오늘처럼 생의 감각오롯이 느끼며 기분 좋았으면 싶다. 걸어 온 거리만큼 다시 걸어야 한다. 길에는 계절이 한창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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