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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마루 Mar 17. 2023

해운대 산책(feat. 청사포)

생각이 길을 걷다

도시의 삶은 항상 자연이 그립다. 자연에 살게 되면 도시가 다시 그리울지는 잘 모르겠지만, 나이를 한 살씩 먹어갈수록 그렇다. 인간의 태생 자체가 나이가 들면 자연에 살고 싶게 프로그래밍되어 있는지도 모르겠다. 서울과 부산에 살면서 누구보다 도시가 주는 혜택을 누리고 살았지만, 역모를 꾀하듯 요즘 나는 자연 속에서의 삶을 꿈꾼다.


부산에 살고 있지만 해운대로 2박 3일 여행 겸 산책을 나섰다. 자연을 보며 걷겠다고 부산에서 제일 번화한 곳으로 산책을 가는 아이러니가 웃기긴 하지만, 부산이 워낙 큰 도시이다 보니 내가 살고 있는 서쪽 지역에서 동쪽의 해운대로 갈 일이 별로 많지 않다. 해운대와는 물리적 거리 못지않게 심리적 거리감이 있다. 늘 외지의 사람들이 왁작대는 곳이라는 그런 선입견 때문일 게다. 그리고 내게 해운대는 늘 술을 마시고 대책 없이 밤바다를 찾은 기억밖에 없는 곳이었다.


이제 매주 연휴가 있어 가까운 곳뿐만 아니라 이렇게 산책의 범위를 넓혀가는 것도 재미있다. 여타의 여행처럼 호텔에 숙소를 정하고, 맛집 몇 군데의 리스트를 뽑고, 산책 코스를 짰다. 재미없이 걷기만 할 여행이었기에 혼자 훌쩍 다녀올 생각이었으나, 동생이 함께 걸어주겠다고 한다. 오션뷰를 볼 수 있는 호텔에 남아있는 방이 넓은 방 밖에 없어서 혼자 쓰기엔 아까웠는데 마침 동생이 간다니 잘됐다 싶었다.


부산을 비롯한 전국에 건조주의보가 내렸었는데, 해운대에 도착하니 비가 온다. 이것도 나름 운치 있어 좋다. 우산 쓰고 바닷가 주변을 산책하고 돌아와 호텔 1층에 있는 수제맥주에서 맛있는 맥주와 바비큐. 음악에 섞인 빗소리를 들으며 동생과 옛날이야기를 했다. 처음으로 아빠와 셋이 술을 마신 추억과 어렸을 때 살던 동네 이야기들..


비오는 오후 신라스테이에서 내려다 본 해운대 바다와 산책 후 동생과 맥주  :)




맑게 갠 다음 날, 아침 일찍 나서서 동백섬을 한 바퀴 돌고 산책길 초입에 있는 조선 델리에서 차 한 잔 하며 아침 산책 끝

사실, 여행 오기 며칠 전 동생과 말다툼이 있었다. 둘 다 요즘 번아웃 징조가 있었던 터라 사소한 말 한마디에 예민해졌다. 동생은 수학선생 나는 국어선생인 것만 봐도 둘의 성격은 극명하게 반대다. 동생은 추리, 공포소설을 좋아하는 반면 나는 시나 문학소설을 좋아하고, 동생은 운전을 잘하는 반면 나는 방향감각이 좋아 길을 잘 찾아간다. 성격이 다르니 집안 일도 별 충돌이 없다. 나는 요리를 꽤 잘하고 동생은 꼼꼼해서 청소와 특히 분리수거를 완벽하게 한다.


함께 늙어가는 처지지만 두 살 어리다는 이유로 내 심부름도 군소리 없이 하는 동생이다. 서로의 장기대로 살다 보니 크게 불편하지도 싸울 일도 없지만 가끔 냉전중일 때가 있다. 동생이 나한테 정색을 했던 것이 미안했던지 내 산책길을 조용히 동행해 준다. 별 말이 없었지만, 어떤 마음인지 서로 안다.


평균보다 조금 일찍 부모와 이별한 동지로서, 비혼의 길을 걷고 있는 길동무로서, 서로에게 조언을 해 줄 수 있는 상담자로서 잘 살아가고 있는 우리들은 오히려 달라서 잘 맞는 단짝 같다. 그리고 무엇보다 둘의 정치 성향과 지지 정당이 같은 것이 우리들이 좀 더 평화롭게 살아가는 비결이 아닐까 싶기도 하다.




오후 산책은 청사포, 한가한 월요일 오후 산책하다 발견한 고즈넉한 찻집에서 다리 쉼


청사포를 걸을 땐 이른 봄의 나른한 햇살이 좋았다. 봄볕에 나앉은 고양이처럼 따뜻한 창가에 앉아 오가는 사람들을 구경하기도 했다. 해변열차 때문에 예전보다 관광객들은 꽤 있었지만, 여기도 젠트리피케이션 때문인지 드문 드문 빈 가게들과, 원주민들이 훨씬 적어진 것 같은 분위기였다. 달맞이 고개 쪽의 초고층 아파트들과 나지막하고 허름한 청사포의 집들의 대조가 비현실적으로 보였다. 청사포에서 미포의 그 호화로운 빌딩들 사이를 지나 해운대 바다로 다시 돌아온다.



히츠마부시를 좋아해, 난생처음으로 오픈런을 해 본 맛집에서 사케 한 잔. 해운대 산책 끝.




사람은 누구나 조금씩 변한다. 시간의 흐름에 따라 서서히, 혹은 어떤 계기에 따라 급속도로 바뀌어버리기도 한다. 변화가 즐거운 일일수도 가슴 아픈 인생의 반전일 수도 있지만, 아무리 해도 좀처럼 바뀌지 않는 것들이 있다. 나는 나, 너는 너라는 한 사람이 가진 고유한 본성이 그것이다.


아무에게도 곁을 내주지 않았던 나의 이기심과 세상을 잘 몰랐던 천진스러움, 고독할 운명에 순응해 버리고 마는 비겁함, 스스로에게 친절하지 않았던 지난 시간들이 나를 조금씩 괴롭히고 있다. 봄에게 자리를 내어주고 물러나는 겨울처럼, '삶'의 반대말은 죽음이 아니라 '물러섬'이다. 나는 요즘 삶의 가녘을 따라 그저 배회하듯 물러서 있는 나를 다시 삶 속으로 밀어 넣는 것에 힘을 쏟고 있다. 그 과정이 산책이다.


마음속 여러 생각들이 소란스러워 걷기 시작했고, 아무 잡념 없이 그저 풍경을 보며 한 발 한 발 떼어놓기로 했지만, 어느새 많은 생각들이 일렬종대로 걷고 있는 산책길. 그동안은 갤럭시 워치가 알림을 보내 현실을 깨워주었다면, 이번 산책엔 동생이 가끔 말을 걸어주어 현재로 돌아오게 만들었다.


앞으로도 계속될 산책은 내 발로 삶을 걷고 있다는 것을 증명해 주는, 가장 원초적이고 확실한 지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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