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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마루 Oct 23. 2023

손톱을 깎다가


평소엔 의식하지 못하고 있다가, 내가 시간을 살고 있구나 느낄 때가 가끔 있는데 손톱을 깎을 때가 그런 때인 것 같다. 어렸을 때는 손톱에 예쁜 색도 입혀보고, 가짜 손톱을 붙여보기도 하고 꽤 멋을 부렸었는데 최근 몇 년 동안은 매니큐어도 하지 않고 짧게 자르기만 한다. 


손톱을 다가 문득 발코니 밖 검은 하늘과 눈이 마주쳤는데 잘려나간 내 손톱과 똑 닮은 것이 하늘에 걸려있어 눈길이 자꾸 간다. 참, 밤에 손톱을 깎으면 귀신이 나온댔나 뱀이 나온댔나 암튼 뭐가 나온다고 엄마한테 등짝 많이 맞았었는데...


지난 여행에서부터 무리를 했고, 내가 가르치는 아이들 중간고사 기간이었고, 날이 좋아 자꾸 밖으로 나가고 싶어서 많이 걸었더니 그만 귀  임파선이 뚱뚱 부어서 병원에 다녀왔다. 약국에 처방전을 약이 나오기를 기다리다가, 전에 없이 마구 약을 사고 싶어졌다. 혈액순환에 좋다는 걸 사볼까 요즘 무릎이 조금 아픈데 관절약을 먹어볼까 경옥고가 효과 있을까 이런 생각을 하다 웃었다. 나이 먹은 징조가 약 쇼핑이라더니 내가 그 짝이네 싶어서다. 그래도 섭섭해 카스 한 병 사서 호로록 마시고 처방약을 받아 나왔다.


손톱을 깎다 말고 발코니 문을 열고 아래를 내려다본다. 주차 중인 차의 헤드라이트가 어둠을 뚫고 비춘 화단에 수줍은 듯 옷을 벗어가는 나무들이 서 있다. 시간에 들기 시작한 은행나무와 벚나무의 갈색 잎들이 서로 겹치며 색을 만들어 내고 있다. 그러나 라이트가 꺼지는 순간 그 풍경원래 그곳에 없었던 듯 어둠묻힌다. 찰나의 아름다운 그림을 만나게 해 준 어둠에게 고마운 마음이 든다. 어둠 속에서는 모든 생명들이 휴식을 취하듯 나도 조금 느긋해져야겠다.


어느 틈엔가 밤공기는 서늘해져 반소매 위로 드러난  으스스하다. 갑자기 누군가의 그늘 속으로 걸어 들어가 저녁이 오는 소리를 듣고 싶어 진다. 문을 닫는다. "뜨거운 여름밤은 가고 남은 건 볼품없지만, 또다시 찾아 올 누군갈 위해서..." 저녁 내내 잔나비가 부르고 있던 노랫소리가 또렷하게 들린다.


손톱을 마저 깎고 내게서 떨어져 나간 시간의 잔해들을 치운다. 손끝엔 내일이 또 차오르겠지. 그런데 어? 아홉 개밖에 없다. 왜 맨날 하나씩 없어지는 걸까? 엄마가 있었으면 또 등짝을 맞았겠다. 



찾았다. 오늘 없어진 손톱 한 개는 하늘에 걸려 있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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