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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마루 Feb 05. 2022

북어를 낚다

우리 집에는 조그만 다락방이 있었다. 계단 때문에 비스듬히 경사가 진 두어 평 남짓한 공간이었는데 학교를 마치고 돌아오면 나는 줄 곳 그곳에서 지냈다. 밥 먹을 때를 제외하면 공부도 거기서 하고 놀기도 그곳에서 놀았고, 첫사랑도 그곳에서 앓았다. 누구도 들어올 수 없는 나만의 공간으로 꾸려나갔다. 엄마 몰래 폭신한 쿠션도 가져다 놓고 라디오 카세트와 아기자기한 소품들도 모조리 그곳에 모아놓아 나만의 아지트를 만들었던 것이다. 그곳에서 주로 하는 것은 라디오를 듣고 책을 읽는 일뿐이었다. 음악방송에 엽서를 보내고 콩트에 응모해 내 이름이 라디오에서 흘러나올 때의 짜릿함을 아직도 기억한다. 돈이 생길 때마다 책을 하나씩 사 모아서 제법 그럴싸한 나만의 서재를 만들었다. 그곳에서 나는 데미안도 호밀밭 파수꾼도 만났다.


중학생 때였다. 학교에 어느 출판사 세일즈맨이 왔는데 어찌나 청산유수로 독서에 대해 설파를 하는지 나 말고도 친구 여러 명이 전화번호와 주소를 써 주고 말았다. 그 사람이 팔던 것은 한국 단편들과 세계 문학전집이었는데, 때깔 고운 책 표지를 보자마자 자진해서 손을 번쩍 들었다. 부모님 허락도 받지 않고 덜컥 사 들고 온 고민도 잠시 뿐, 다락방에 꽂아 놓고 몇 날 며칠을 읽어 댔다. 그 후로도 더러 책장사에게 낚여 책을 사다 날랐고 그 대가로 꿀밤이 몇 대씩 돌아왔지만 헤헤거리며 다락방으로 올라갔다. 국문학을 공부한 것은 당연한 귀결이었다.


학교 졸업 후 서울로 올라가 국회사무처에서 근무했는데 틀에 박힌 공무원 생활이 나와는 맞지 않았다. 책 읽고 무엇인가 끄적거리느라 새벽녘에야 잠이 드는 전형적인 야간형 인간이었던 나는 아침 일찍 일어나 정해진 시간에 출근하는 생활이 힘들었다. 그나마 공무원 생활을 5년이나 기껍게 했던 것은 국회도서관 때문이었다. 본청에서 지하통로를 이용해 일주일에 두세 번씩 국회도서관에서 책을 대출해서 읽는 재미로 견뎠다. 서가에 떠돌던 은은한 책 냄새는 아직도 떠올려진다. 


어디서 나온 용기인지 지금 생각해보면 무모하다 싶지만, 공무원 생활을 그만두고 집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가족들의 걱정과 잔소리에도 꿋꿋하게 견디며 일 년 동안 아무것도 하지 않고 오로지 책만 읽으며 지냈다. 그 일 년 동안 최영미 시인의 <서른, 잔치는 끝났다>를 읽으며 내 서른을 미리 내다보기도 하고, 신경숙의 <깊은 슬픔>을 읽으며 편지를 쓰기도 했다. 또 내 인생에 빠트릴 수 없는 무라카미 하루키의 탐독도 그때 시작되었다.



지금은 서재도 따로 있지만, 아파트 거실 한쪽 벽에  책장을 넣고 큰 테이블을 놓아 나만의 북카페를 만들었다. 크기는 몇 배 커졌지만 그 옛날 다락방인 셈이다. 이곳에서 옛날처럼 책을 읽고 글을 쓰고 음악도 듣는다. 국어학원을 운영하며, 가르치는 고등학생들의 문학 시험지도 채점하고, 글을 쓰고 싶어 문예창작학과에 진학하겠다는 내 학생의 수줍은 원고도 봐준다. 공부보다 책 읽기에 몰두한다고 잔소리를 할 엄마도, 딸의 옹색한 책장이 모자라면 나무판자로 뚝딱 작은 책장 한 칸을 늘려주던 아버지도 안 계시지만 현재의 나는 그때의 다락방 소녀에서 크게 달라지지 않았고 달라지고 싶은 욕망도 없다.


게 책 읽기는 북어를 낚아 올리는 것과 같은 것이다. 그렇다면 내게 삶의 방향을 일러준 수많은 대 문호들은 북어를 만드는 사람들이겠다. 한때는 저 먼바다에서 유영했던 명태를 낚아 손질해서 해풍에 널고 걷어 들이는 정성에 피 땀을 흘렸을 테다. 어부들이 명태를 찾아 헤매듯이 소재를 구하려고 고뇌하고, 명태를 말려 북어쾌를 만들 듯 글을 엮어 내었을 것이다. 나는 그렇게 그들이 세상에 내어 놓은 북어를 낚아 뼈 바르고 살 발라 내면의 살을 찌운다. 


내게도 살아 헤엄치는 명태를 낚고 싶은 욕망이 없으랴만, 바늘 없는 낚싯대를 드리우고 있는 강태공을 떠 올려 보면 어차피 명태든 북어든 낚아 올리는 것은 세월이고, 인생이며, 삶이고, 인간의 존재 이유다. 어쭙잖은 낚시 실력으로 바다와 피 튀기는 사투를 벌이기에 나는 너무 나태하고 안될 일에 힘 빼지 않을 만큼 영악하다.


조금 더 편안하고 빠른 길을 찾는 것은 당연하다. 빛의 속도로 변해가는 세상에 살면서 여전히 책 속에서 진리와 지혜를 캐내는 것은 뒤처진다고 여겨질 수도 있다. 하지만 디지털의 향연 속에서는 자칫하면 길을 잃기 쉽다. 속도만 중시하고 빠른 기교만 배운다면 우리 삶은 점차 일회성으로 치달을 것이고, 참을 수 없는 앎의 가벼움이 날개를 달 것이다.   


삶의 한 복판에서 길을 잃지 않기 위해 나는 오늘도 북어를 낚는다. 그런데 혹시 아나? 열심히 북어를 낚다 보면 눈먼 명태 한 마리 걸리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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