취향이라, 참 대단한 단어야.
인간이라는 단어를 대체할 수도 있지 않을까 싶은 몇 안 되는 단어 중 하나지.
전혀 다른 정반대의 요소를 서로 다르게 좋아할 수도 있고 싫어할 수도 있다니 말이야.
비슷한 레벨의 인간으로서는 비슷한 레벨의 인간을 이해하기 어렵잖아.
난 여전히 닭 다리살보다 닭 가슴살이 더 맛있다는 사람을 이해할 수 없어.
그런 사람이 싫다는 게 아니라 그저 그런 결정 자체가 내 시스템 속에서는 절대로 판단해 내지 못 할 결정이라는 거지.
인간이 내릴 수 있는 결정의 범위를 생각하면 닭 다리살이냐 닭 가슴살이냐는 사소해.
그런 사소한 결정을 넘어서서 중대한 결정까지에 영향을 미치는 취향이라는 카테고리에 빠져들다 보면 내 정의를 잃어가는 것 같아.
내가 좋아하는 게 진짜로 좋은 건지, 내가 싫어하는 게 진짜로 싫은 건지.
다른 사람의 시선에 동요하거나 영향을 받는다는 게 아니라, 내가 내린 취향의 결정이 정말로 나의 정답이냐는 것에 대한 의문이 든다는 말이야.
이런 생각들을 하며 꽤 오래 살다 보니 이제 와서 나는 이전에 없던 어떤 능력을 얻었어.
필요성만 느낀다면 내가 좋아하기로 한 것을 좋아할 수 있고, 내가 싫어하기로 한 것을 싫어할 수 있지.
당연히 절대적으로 선택할 수 있는 것은 아니지만, 어느 정도 아니, 꽤 효율적으로 유도할 수 있게 됐어.
평생 못 봐왔던 공포영화는 여전히 못 보지만, 싫어했던 운동을 좋아하기로 하고 22kg 이상의 체중 감량의 성공을 할 수 있다던지.
평생 거부했던 성에 대해서는 여전히 거부감이 들지만, 싫어했던 인간을 좋아하기로 하고 인간혐오를 피해 친구를 만들 수 있게 됐어.
아닌 척하곤 있지만, 난 이런 평범한 사회 속에서 평범하게 주고받는 평범한 대화가 정말로 특별해.
꽤 잘 하고 있는 중이야.
어쩌면 사기를 치고 있다는 생각이 들 정도야.
난 원래 이런 사람이 아닌데, 어쩌면 네 기준에는 난 사람이 아닐 수도 있는데, 넌 나를 사람으로, 좋은 사람으로 대해주니까 얼마나 황송하던지.
그래서 저번 상담 때는 선생님께 내가 사기를 치고 있는 느낌이 든다고 했어.
그랬더니 선생님께서는 그 모습 또한 나의 일부이고 나의 노력이니 당당하게 받아들이라고 하시더라.
그래, 받아들여야지.
난 지금 기분이 좋아.
내가 아닌 나로서 받는 호의가 어색하긴 하지만, 애정 결핍에 떨어진 호의의 물줄기가 얼마나 파괴적인지 넌 모를 거야.
안다면 미안하고.
이제는 분리된 여럿의 ‘나’들이 익숙하고 편해졌어.
사회에 적응해 가며 그들 속에 섞여 들고 호의를 주고받는 새로운 나를 통해서 나도 인간에 가까워져 보도록 할게.
조금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