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도전 - 민중을 위한 진짜 혁명가

by 감성소년

* 성폭행범을 자료에 넣을 수 없어서 육룡이 나르샤에 김명민을 넣었습니다



꽤 오래전에 정도전이란 드라마가 방영되었었다. 이 드라마는 기존의 사극과 다르게 엄청난 인기를 누렸었다. 사실 그 이유를 당시에는 잘 몰랐었다. 그 이유가 무엇일까. 물론 극 구성과 연기자들의 열연도 돋보였다. 하지만 그 당시의 정치적 상황과 잘 맞물려서 인기를 누렸던 것으로 지금은 생각이 든다. 그러한 의미에서 조선의 최고의 혁명가였던 정도전에 대해서 알아보고자 한다.

1. 정도전 생애

정도전의 어머니는 천민 출신이었다. 아비지는 지방의 향리였었고, 그래서 결론적으로 신분으로는 굉장히 천출의 한계성을 갖고 있었다. 하지만 그는 굉장히 훌륭한 학식을 가졌었다. 그는 이색의 후학으로 들어가서 공부를 하였으며 그의 동문으로는 동방의 주희라 불렸던 정몽주가 있었다. 이 들은 당대 공민왕의 성리학 장려 정책과 맞물려서 신진 사대부를 형성하여 여론을 주도하고자 하였고, 당시 권문세족의 친원적 정책에 맞서서 반원 정책과 고려의 자주 정책을 추구하던 공민왕의 정책을 뒷받쳐주기 위해 노력했다. 그 중에 대표적인 것이 바로 정도전이었다. 정도전은 당시 집권자였던 이인임이 친원적 성향으로 일관하기 위해 원에서 사신을 모셔와 정도전으로 하여금 모시게 한다. 이 때 정도전은 이를 거부하였는데, 이 것을 계기로 하여 전라도 지역으로 귀향을 가게 된다. 유배생활 동안 기록에 의하면 정도전은 당시 고려말 민들의 힘든 삶을 보게 되었고 이 때부터 백성들을 위한 위민 정치, 대의를 꿈꾸게 되었다고 한다. 정도전이 귀향가고 난 후 고려 정국은 공민왕 암살 이후 이인임의 주도하에 우왕을 왕위에 세우고 정국을 주도하였었는데, 최영의 정치적 한계로 인하여 이인임등 권문세족 당여들이 정권을 완전히 주도하고 있었다. 그러던 와중에 정도전의 귀향이 끝나게 되고 그는 당시 어지러운 난국을 타개할 수 있는 인물로 이성계를 낙점한다. 그는 직접 두 발로 이성계까 있는 북방으로 올라가서 이성계를 만나 고려를 무너뜨릴 것을 제안한다. 이에 뜻이 맞았던 두 사람은 평생토록 동지가 되어 대의를 도모하게 된다. 이성계는 이후 남쪽의 왜구를 토벌하는 황산 대첩을 주도하며 주요 관직을 차지하게 되었지만, 이인임의 계속된 견제로 성장하지 못하다가 최영과 힘을 합쳐 염흥방등 이인임의 당여들을 제거하고 이인임을 몰아내는데 성공한다. 이 후 이성계는 명의 철령위 설치 문제에 대해서 최영과 대립하다가 결국 당시 집권자였던 최영의 강요에 의해 요동정벌을 강행하게 된다.

하지만 4불가론을 내세울 정도로 이에 반대했던 이성계는 정도전의 권유에 따라 위화도에서 당시 우군 도통사였던 조민수와 뜻을 모아 위화도에서 회군하게 되었고 개경에 있는 최영 세력을 척결하고 권력을 잡게 된다. 그리고 우왕을 폐하고, 창왕을 세웠고 이 과정에서 조민수를 제거하고 명실상부 최고 일인자가 된다. 이때부터 정도전은 과전법 및 조선건국을 둘러싸고 자신의 오랜 벗이었던 정몽주와 갈등하게 되는데, 결국엔 선죽교에서 이방원의 주도하에 정몽주가 제거되고 마지막 왕이었던 공양왕이 폐위되면서 고려는 멸망하게 된다. 이 후 정도전은 조선건국을 주도하며, 제도, 정치체제, 문화, 경복궁 중건등 여러 분야에서 체제 정비에 힘썼고, 이성계는 정도전에게 '유종공종'이란 칭호를 줄 정도로 신뢰하고 따랐었다. 하지만 공신 책봉 문제, 세자 책봉 문제, 정체 문제에 있어 당시 왕자였던 이방원과 갈등하게 되었다. 그 때 마침 '표전문 사건', 여진 쇄환문제등으로 명과 갈등이 절정에 달하게 되자 정도전은 요동정벌을 추진하게 되었다. 이 과정에서 진법 훈련을 대규모로 하는등 군사훈련을 강화하는 한편 사병혁파를 도모했지만, 결국 이에 반대했던 라이벌 이방원에게 제거됨으로써 그의 생은 마감되게 된다.

2. 그가 훌륭한 정치가였던 이유

정도전은 조선에 몇없는 개혁가였다. 그 것은 그가 주장한 것을 토대로 하면 파악할 수 있다. 고려말 당시 전제개혁론이 있을 때, 대부분의 사람들은 수조권 재분배를 주장했다. 이 것은 소유지를 인정하고, 대신 관리들에게 주는 수조권(소유지에 수조할 수 있는 권리)을 재분배하자고 주장할 당시에, 정도전은 계민수전, 즉 소유권의 재분배를 주장한 몇 안되는 성리학자였다. 이는 사실 비현실적이었긴 하지만, 가장 성리학 이념에 맞는 개혁내용이었다. 성리학은 주희가 공자의 유교를 형이상학화한 학문이지만 그도 역시 맹자가 주장한 정전이념을 추구하였는데, 이 정전제란 토지 900무를 '정'자로 구획하여 8호에 100무씩 나누어 주는데, 이 중 나머지 100무를 조전으로 하여 공동경작하여 공동으로 세금을 납부하게 하는 제도이다. 이 제도는 결국에 모든 사람들로 하여금 토지를 갖게 하는 제도로 오늘 날의 공산주의제도와 유사하다. 하지만 정도전의 경우, 고려말 상황을 비춰봤을 때, 백성들에게 자신의 토지를 갖게 하는 것은 당시 엄청난 혁명적인 내용이었다. 당시 고려사에 따르면 권문세족은 토지를 산천을 경계로 하여 소유지를 갖고 있었고 백성들은 그 대농장에 기탁하여 고율의 소작료를 내면서 기탁하며 살았다고 한다. 그마저도 토지 소유자가 한 토지에 2~3명으로 기록되어, 농민들은 2~3명에 대해 지대를 제공하는 형태로 있었다고 한다. 한 마디로 빌린 땅도 제대로 갖지 못하고 있었는데, 소유지를 분배하자고 주장하는 것이다. 1단계에서 2단계로 나아가는 것이 아니라 1단계에서 3단계를 지향했던 것이다. 하지만 결국 현실적인 면을 수용하여 그는 수조지 재분배라는 과전법을 시행했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그는 분명 계민수전 소유지의 재분배를 주장한 사람이었다는 것이고, 지금으로 치면 무상으로 집을 재분배하자고 주장하는 것과 마찬가지의 혁명성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었다.


그리고 정치적으로도 그는 재상정치를 주장하였다. 재상정치는 사실 성리학에서 추구하는 군신공치의 이념과 잘 맞다. 맹자는 왕도정치라 하여 도를 가진 왕이 정치를 하면, 피지배민들이 자발적으로 지배질서에 귀의하는 자치질서를 추구하는데, 이러한 것을 행할 수 있는 구체적인 정치가 재상정치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이러한 정치 이념은 그의 조선 경국전에 잘 나와있다. 그는 총재론에서 재상이 정치를 주도하는 이러한 재상정치를 추구하였고 이러한 정치에 이를 수록 민의를 잘 반영할 수 있다고 주장하였다. 사실 이 정치형태 자체가 그의 권력에 대한 사욕이었는지, 아니면 정말 민의를 잘 대변하기 위한 능력주의 사회를 만들기 위한 정체였는지는 그가 아닌이상 알 수가 없다. 하지만 계민수전을 추구하고자 했던 혁명가로서의 그의 행적을 봤을 때, 분명히 그는 능력주의적인 면으로 재상정치를 추구했을 가능성이 높다.




이렇듯 그는 정치, 경제적으로 민본정치를 지향하였다. 그리고 요동정벌을 통해 명에 굴욕적으로 사대하는 것이 아닌 주체적인 입장에서 당당하게 사대를 할 수 있는 자주 국가를 실현하고자 했으며, 이외에 경복궁 중건, 조선 법전의 토대가 되는 조선경국전 편찬, 숭유억불 정책등의 조선의 기틀을 마련하였다.


개인적으로 그가 정말 훌륭한 사람이라고 생각드는 점은 그가 추구했던 계민수전에서 나는 볼 수 있다고 생각한다. 당시의 현실적인 상황이 아닌 자신의 이상과 사회의 이상을 추구했던 괜찮은 혁명가였던 정도전. 그의 행적은 지금 국회의원들에게는 찾아 볼 수 없는 신념이 있고, 그에게는 나름의 철칙과 원칙이 있었으며, 수 많은 실패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발로 이성계를 찾아 갈 만큼 과단성이 있었던 사람인지라 오늘 날에 귀감이 되는 것 같다. 그래서 그러한 멋진 정치인에 대한 갈증이 당시 정도전 드라마의 인기 비결이 아니었을까 싶다. 오늘날을 사는 사람들도 사실 이상을 꿈꾼다. 조금 더 나은 환경에 있기를, 조금 더 괜찮은 조건의 연봉이 있기를. 그러한 사람들의 바램을 잘 표현하였던, 정도전이란 드라마. 그 드라마의 열풍이 지난 2021년 아직도 여전히 대중들은 정도전과 같은 정치인을 꿈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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