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민족의 위대한 스승

스승의 날 특집

by 감성소년

5월 15일은 스승의 날이다. 비록 김영란 법 시행으로 스승의 날이 조심스러워지긴 했지만, 의미가 있는 날이기는 하다. 이 스승의 날이 근데 어떻게 시작했는지 아는가? 이는 1958년 충남 강경여자충고등학교의 청소년적십자단원들이 병환 중에 있는 선생님 위문과 퇴직한 스승의 위로 활동에서 시작되었다. 이 것이 계기가 돼 1963년 청소년적십자사 중앙학생협의회에서 처음으로 5월 26일을 은사의 날로 정하게 된다. 그 이후 64년 은사의 날을 스승의 날로 변경했으며 이듬해인 1965년 스승을 세종대왕처럼 존경하자는 취지에서 세종대원 탄신일인 5월 15일로 변경했다. 그러니 5월 15일은 세종대왕의 탄신일인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 민족의 위대한 스승인 세종대왕에 대해서 알아보고자 한다.




1. 생애



사실 세종대왕은 조선의 왕위계승 제도 상 왕위에 오를 수가 없었다. 셋째 아들로 태어났기 때문이다. 하지만 첫째 형 슈퍼 놈팽이 양녕 대군의 대활약으로 (정승의 첩과 사랑을 나눴고, 나중에는 자신의 손주의 여자도 건들였다는.........) 폐세자되는 덕분에, 그는 세자로 간택되어 왕위에 오르게 된다. 사실 세종의 대활약 속에는 태종의 활약도 크다. 일단 태종은 자신이 살아 생전에 왕위를 세종에게 넘겨주며 자신은 태상왕의 직위에서 군권을 갖고 있었다. 그리고 숙원이었던 대마도 정벌은 단행한다. 대마도 정벌은 실패로 끝났지만 어찌되었든 왜구들에게 매운 맛을 선보여주었고 계해약조를 체결하여 합법적인 거래라는 수단하에 왜구들을 통제하는 것에 성공하여 남쪽 변방을 안정시킨다. 이렇게 쾌조의 스타트를 시작한 세종. 사실 그가 즉위했을 때, 별 위협세력이 거의 없었다. 왜냐하면 태종 이방원이 위협될 만한 인물들은 싹다 제거했기 때문이다. 그의 장인 심온의 경우 명사신으로 갔다가 돌아오는 행렬에서 백성들의 많은 지지를 받자, 위협이 된다고 제거가 되었다. 그리고 그의 아내까지 폐하려는 상황에서 세종의 극구만류에 의해 저지되었다고 한다. 이런 안정된 왕권 속에서 .대외, 대내적 안정을 도모하였다. 대외안정을 위해 최윤덕, 김종서를 보내 4군 6진을 개척하였다. 그리고 동시에 야인들에 대해서 융화책과 강경책을 동시에 쓰며 국방안정을 했다. 그리고 대내적 안정을 위해 공법 제정은 물론, 농업 장려를 위해 농사직설을 편찬, 보급하였고 측우기 제작, 칠정산 역법등을 통해 농업 생산을 효율적으로 할 수 있도록 도와주었다. 이 뿐아니라 유교 질서를 안정시키기 위해 삼강행실도 편찬, 국조오례의등의 예서를 정비하기도 했다. 이 당시 국방도 굉장히 튼튼하여, 화포개량을 도모하였고 이를 국방에 배치하였는데, 그 수가 100여대가 넘었다고 하니, 여진족이 아무리 용맹하기로 하니, 대포를 이겨내겠는가. 어쩐지 왜 세종 때 아무런 침입이 없다 하였다. 하지만 진작 그는 굉장히 슬픈 삶을 살았다. 육고기를 좋아했던 세종 대왕은 평소 운동량은 많지 않았던 것 같다. 그래서 병을 달고 살았다. 그는 말년에 몸이 너무 안좋아 세자에게 업무를 넘기었다. 그러자 세자마저 몸이 안좋아지기 시작한다. 자신의 세자비는 레즈비언도 있었고, 시기를 너무 잘하여 다른 첩들에대해 저주를 내리는 굿을 한 비도 있었다. 그리고 자신이 죽고나서, 계유정난등... 다사다난한 것이다.






2. 세종의 위대한 한글 창제

1443년 그야말로 위대한 창작이 이뤄졌다. 한글 창제가 이뤄진 것이다. 전세계에서 유일무이하게 창제된 시기가 있으며, 창제한 사람이 누구인지 정확하게 알 수 있고, 창제한 취지까지 정확하게 적혀있다. 그리고 자음, 모음 28자만 있으면 거의 대부분의 소리를 표기할 수 있는 엄청난 문자이며, 현재 대부분의 국가에서 자국어가 모두 키보드 자판에 들어가지 않아 알파벳을 쓰는 경우가 많은데, 한글은 이 편리성 덕분에 키보드에 알파벳을 대체해서 쓰고 있지 않다. 이 덕분에 우리가 it강국이 된지도 모른다. 한글 창제를 두고 정말로 많은 의견들이 있다. 세종대왕 혼자 창제한 것이라는 의견이 있고, 인도의 산스크리트어를 표방하여 만들었다는 말도 있다. 어쨋든 그 취지와 그 목적이 분명했고, 이는 분명 백성들을 위한 편민의식과 동시에 당시 농업생산력 향상에 따른 백성들의 성장에 따라, 이 들과의 대민 소통을 활성화시키겠다는 그의 분명한 목표가 있었음도 확실하다. 이를 바탕으로 그는 세계 최초로 여론 조사를 한다. 여론 조사 내용은 바로 토지 조세제도 개혁이었다. 공법이란 내용인데, 이는 토지 결수를 토대로 6등급, 풍흉을 기준으로 9등급으로 나누어 4두에서 32두에 이르기까지 차등적으로 수취하는 법이었다. 참으로 대단하고 참으로 멋진 발상이었다. 그 제도도 너무도 멋진데, 이를 농민들에게 물어보는 여론조사를 실시하다니...........내가 공자를 잘 몰라서 그럴 수도 있지만 개인적으로는 공자보다 더 위대하다고 생각한다.



3. 세종대왕의 애민 정신


대궐에 초가집이 생겼다. 무슨 말이 안되는 소리인지 모르겠지만, 실재로 생겼다. 세종대왕재임시기 조선은 건국이래 최고의 풍년이었고, 국가 재정상태도 역대 사상 최고였다.(조선 역사상) 이는 청백리가 넘치던 당시 정치 문화, 그리고 세종대왕의 뛰어난 조세 제도도 있을 거지만, 그 만큼 확실히 상경 농법, 즉 휴경 없이 매년 작황이 가능한 것, 이 가능했다는 것이다. 이 덕분에 모두가 잘 살 것만 같았다. 하지만 실상은 아니었다. 세종 대왕시기에도 반란이 있었다. 참 슬프게도 가난한 사람들이 있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흉년도 있었다. 흉년이 생겼고, 이에 굶주리는 백성들도 있었다. 근데, 놀라운 것이 있다. 세종대왕들은 반란에 대해 극히 드문 경우가 아니고는 사형시키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리고 흉년이 발생하면 백성들의 슬픔을 같이 공감하기 위해 대궐 옆에 초가집을 짓고 몇 일동안 거처했다고 한다.

이뿐인가. 노비 사랑도 있었다. 지금도 육아 휴직이란 것이 있다. 근데 과거 노비를 사람취급하지 않은 상황에서 육아 휴직이 있었다는 것이 믿겨지는가. 세종은 여노비에게 일심시 6개월동안의 출산휴가를 주었다.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심지어 남자 노비에게도 휴가를 주었다는 것이다. 믿겨지는가? 양반들의 주 노동력이 노비였으니, 분명히 양반들의 반대를 받았을 것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종은 이를 시행했다. 정말로 애민정신이 아니고서는 이를 알 수가 없는 것이다.



솔직히 서양의 많은 왕들에 대해서 잘 모른다. 하지만 프랑스에 꽤 괜찮은 왕이었던 필립4세, 영국의 꽤 괜찮은 왕이라 불렸던 엘리자베스 여왕도 위와 같이 할 수 있겠는가. 엘리자베스 시기 때 복지제도의 근간이 마련되었다고는 했지만 여론조사를 했다는 말은 들어본 바가 없다. 프랑스의 필립4세가 삼부회란 초기 의회를 활성화시키기는 했지만, 어디까지나 자신이 교황령을 공격하기 위해 명분을 얻기 위함이었다. 자신의 이익을 위해 백성을 위한 일을 하는 척하는 왕들은 있어도 진정으로 백성들을 사랑한 왕이 있었는가. 세종대왕만한 왕은 없다. 그래서 일제 사학자들도 세종대왕은 폄하하지 못했었다. 그런데.....그런 와중에 훈구도, 사림도, 일제 사학자들도, 광복 이후에 진단학회도 못했던 일을. 그 대단한 일을 이영훈씨가 하고 있다. 이영훈은 세종이 부민고소금지법을 만들어 조선을 노비의 나라로 만들었다고 하는데, 이에 대한 통계는 없다. 당시 노비제 사회였던 당시 맥락은 고려하지도 않고, 구체적인 증거도 없고, 하나의 일례를 들어 전체를 비하하는 이영훈식 역사왜곡. 그는 누구를 위한 역사를 하고 있는지 모르겠다.


아무쪼록 세종은 정말 한국사에 있어서 만큼은 위대한 인물이다. 그의 애민정신은 현재에도 많은 이 들에게 표본이 되어 대왕의 칭호를 붙여 드렸다. 그가 했던 많은 공적들은 분명 오늘 날에 교사 뿐 아니라 강단에서서 학생들을 지도하는 이에게 무엇이 덕이며 무엇이 베푸는 것인지 많은 귀감이 되고 있다. 스승의 날, 그의 애민정신은 한 번 더 빛을 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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