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석주 선생님은 황해도 재령 군에서 태어났습니다. 그는 양산 학교에서 학문을 배웠는데 이곳은 백범 김구가 설립한 학교였습니다. 김구를 스승으로 모시며 그는 굳센 독립투사로 거듭나기 시작했습니다. 그는 23세 때 북간도로 망명하여 독립운동가를 양성하는 대표적인 기관인 신흥무관학교에서 4년간 공부를 했습니다. 그리고 이후 3.1 운동이 일어나자 여기에 참여하였다가 일본 경찰에 붙잡혔다고 하네요.
이후 1910년 김덕영 등 50명의 동지들과 항일 비밀결사를 조직하여 무기를 구입한 후 군자금 모금활동, 친일파 숙청 등을 전개하였습니다. 이들이 지주 및 친일파들로부터 받은 자금을 임시정부로 송금하는 등의 활약을 했는데요..
이후 임시정부에서 임시정부의 요원들을 경호하던 그가 1926년 의열단에 가입하게 됩니다. 이는 자신의 스승이었던 김구의 요구도 있었고 당시 문화통치 아래 침체되었던 독립운동을 좀 더 활성화시키고자 했던 임시정부의 의도도 있었던 듯합니다. 의열단에 가입한 그는 1926년 12월 중국인 이름 마중덕으로 변장한 뒤 인천으로 잠입했습니다. 그리고 토지 조사 사업 등으로 조선민들의 많은 경제 이권을 침탈했던 동양척식주식회사를 공격하는 것이 주목표였습니다. 마중덕으로 변장한 나석주는 열차를 이용해 평안남도 진남포로 향하게 되죠.
김구선생님이 나석주에게 보낸 편지
사실 그는 고향에 들려 부모님을 먼저 뵙고자 했습니다. 하지만 일제의 삼엄한 경계로 뵙지 못하고 바로 경성으로 가게 되는데요. 1926년 12월 28일 중국인 전용 여관 '동춘전'에 들어갑니다. 아침밥을 든든히 한 나석주는 거리로 나서게 되죠. 유난히 바람이 차가운 겨울, 오후 2시 5분 나석주는 식산은행으로 들어가 폭탄을 던졌습니다. 하지만 이 폭탄은 불발로 끝나버립니다.
동양척식주식회사
하지만 나석주는 지체 없이 동양척식주식회사로 발걸음을 옮깁니다. 동양척식주식회사로 들어간 나석주는 기민하게 움직이기 시작합니다. 1층에 있는 일본인 1명을 권총으로 사격하고 2층으로 올라가 토지개량비 간부를 거꾸러뜨립니다. 그리고 기술과장실에 폭탄 1개를 던졌습니다. 하지만 이 또한 불발로 끝나게 되죠.
이때부터 일본 경찰과의 추격전이 시작됩니다. 지금의 을지로 쪽에서 도망을 가던 나석주는 추격하는 경찰을 향해 3발을 쏩니다. 이를 통해 일본 경감 다하타유이지등을 사살하죠. 하지만 워낙 수적 열세에 놓인 나석주는 결국 총을 맞고, 쓰러지게 됩니다. 그는 마지막으로 군중들을 향해 다음과 같이 소리를 쳤다고 하네요.
조선식산은행
나는 조국의 자유를 위해 투쟁했다. 2천만 민중아, 분투하여 쉬지 말라
그리고 남은 탄환으로 자결을 하고 운명을 하셨습니다.
정부에서는 선생의 공훈을 기려 1962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했다고 하네요
2. 내 생각
31운동과 학살이 자행된 지역
그 당시도 그랬지만 사실은 의열단의 활동에 대해서 부정적으로 보는 분들도 많을 거라 생각이 듭니다. 하지만 저는 다르게 생각하는 게 3.1운동에서 수많은 군중들이 무기 하나 없이 시위를 했지만 일제는 처음부터 끝까지 유혈 진압을 하였습니다. 그 결과 7,509명이 사망했고, 15,961명이 상해를 입었고 46,948명이 수감이 되었죠. 제암리 학살 등이 자행된 것도 너무 유명한 일입니다. 과연 합법이란 영역에서 우리가 독립운동을 추구했다면 과연 독립운동이 사람들에게 각인은 될 수 있었을까요? 저는 아니라고 봅니다. 의열단의 활동으로 인해서, 그리고 이후 의열단을 모태로 하여 창설된 한인애국단의 활동으로 인해서 침체되었던 독립운동이 부활되게 됩니다. 특히 윤봉길의 의거는 중국 국민당의 장제스의 찬사를 이끌어냈으며 이후 임시정부를 지원하게 된 계기가 되었죠. 그리고 이후의 지속적인 독립운동으로 카이로 회담에 참여하는 장제스에게 김구가 조선의 독립을 꼭 이야기해달라고 부탁을 했고, 장제스는 실제로 카이로 회담에서 조선 독립을 명기하게끔 하죠. 이렇듯 의열단의 활약은 실로 엄청났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의열단의 대표주자였던 나석주를 우리는 기억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이 듭니다.
나석주의 의거를 알린 동아일보
30대의 나이. 조국의 독립을 위해서 문화통치 하에 일제의 감시가 극도로 강했던 시기, 그것도 경성에서 독립을 부르짖은 청년 나석주. 우리가 기억해야 하지 않을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