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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감성소년 Feb 24. 2022

오늘의 역사는?2월24일(삼전도의 굴욕)


오늘은 2월 24일!

어떤 역사적 사실이 있을까요?

바로!



삼전도의 굴욕입니다!

조선시대 국망과 함께 최악의 역사적 사건이었던 삼전도의 굴욕!

같이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인조 정권



사실 인조정권은 광해군 정부를 무너뜨리고 들어선 정부입니다.

특히 광해군의 폐모살제(어머니를 폐하고 동생을 죽임)와 더불어

중립외교는 중화사상(중국 중심의 사상)을 중시하는 사대부들의 분노를 야기했고

이 것이 인조반정의 명분이되어 인조가 왕이 되었습니다.

이후 인조는 친명배금이라하여 당시 중원에 떠오르는 강자였던 여진족이 세운

후금을 배척하는 정책을 실시하여 정묘호란을 한 번 겪습니다.

다행히 후방이 불안정했던 후금이 형제의 맹을 맺고 퇴각을 함으로써 끝이나게 됩니다.






병자호란


누르하치가 죽고나서 이어 즉위한 홍타이치는 나라이름을 청으로 바꾸고

조선에 대해서 사대를 요구합니다.

사대란 국가와 국가간에 황제와 신하로서의 예를 맺는다는 것을 의미하는데

조선의 경우 당시 명나라만을 황제로 모셨기 때문에 성리학을 국교로한 조선의 사대부입장에선

받아들일 수가 없었죠....

하지만 인조는 딱히 국방력 강화에는 힘쓰지 않으면서도 사대의 명분을 위해

청나라를 자극하는 문구의 서신을 보냅니다

이 것이 계기가 되어 일어난 것이 바로 병자호란 입니다.


영화 남한산성



홍타이치가 이끄는 약 10만의 청군이 압록강을 도하함으로써 병자호란이 발발합니다.


병자호란의 목표는 단 하나뿐이었습니다.




조선의 왕을 사로잡아라



청황제 홍타이치는 정예부대를 보내 인조가 정묘호란 때와 마찬가지로

강화도로 가지 못하게 길을 막아버립니다.

이에 인조는 남한산성으로 들어가게 됩니다

남한산성에 들어간 인조는 왕을 구출하기 위한 근왕군을 불러모으려 했습니다.

그리고 실제로 함경도, 평안도등 북쪽 지역을 제외한 남쪽 지역은 여전히 건재하여

많은 근왕병이 모였습니다.

하지만 간신 중에 간신이었던 도원수(군사 총책임자)김자점은 경기도 양평에서 움직이지도 않았고

그 밖에 여러 지역에서 올라온 근왕군은 청군의 별동대에 의해 각개격파 당함으로써 남한산성을 구원하지 못했습니다.




기근과 굶주림



삼전도 비 

조선군은 애초에 전쟁 준비가 전혀 되어 있지 않은 상태에서 남한산성으로 퇴각한 것이었으므로

성 내부로 퇴각한 12,000의 군사와 수만의 백성들을 지탱할 수 있는 비축물자가 없었습니다.

설상가상으로 겨울철의 혹심한 추위로 동사자가 다수 발생했으며 식량은 바닥을 드러내기 시작합니다.

인조조차 죽 한그릇으로 하루 한끼를 이어가는 상황에 이르게 되었죠.

그리고 이 때, 강화도에 가있었던 봉림대군과 비빈들이 청군에 의해 함락되었다는 소식이 들리자,

결국 인조는 2월 22일 항복을 결정하고 2월 24일 남한산성에서 나오게 됩니다.



항복

사극 '궁중 잔혹사'


삼정도에서 행해진 항복의식은 삼배구고두례로 진행이 되었습니다.

이는 세 번 절 할 때마다 세 번씩 머리를 땅에 찧도록 하는 의식이었습니다.

2월24일 인조는 이 의식을 삼전도에서 행했고 공식적으로 청에 항복합니다.

청 태종은 인조의 항복을 기념해 삼전도에 기념비를 세웠습니다




결과


영화 최종병기 활에 포로가 된 자인(문채원)

전쟁 이후 청군에의해 강제로 납치된 포로가 약 50만명에 이른다고 합니다.

이 들은 청나라로 가서 비참한 생활을 하게 되었습니다.

특히 청나라에서는 이 들을 다시 조선으로 데려오려하는 조선인 가족들의 마음을 이용하여

돈을 받고 파는 '속환'의 형태로 일종의 사람 장사를 했는데요.

당시 속환의 가격인 속가가 25냥에서 비쌀 경우 1,500냥에 이르렀다고 합니다(신분에 따라 가격 결정)




내 생각


인조정권은 애초에 광해군의 중립외교를 비판하고

친명배금 정책을 추구했던 국가였습니다.

그렇다면 당연히 그에 따른 국방력 강화가 있어야 했지만

인조는 자신의 불안정한 왕권을 강화하기 위해 정적들을 제거하는데 주력했고

그 과정에서 인조 반정의 최고 공신이기도 했던 이괄이 난을 일으키기도 합니다.

이괄의 난은 결국 진압되었지만, 문제는 이로써 서북방지역에 있었던 병력들이

모조리 싹쓰리되어 정묘, 병조호란 때 아무런 대처도 못하고 그대로 한성으로 내려와

삼전도의 굴욕을 맞보게 된 사건이 되었죠...


사실 이 것은 과거의 일이 아닙니다.

항상 어떤 주장에는 구체적인 정책, 또는 근거가 따라야 합니다.

최근 정치양상이나 토론을 보면 근거 없는 비방이 난무하는 것 같아

마치 친명배금을 주장했지만 실제로는 이를 이행할 힘도 없었던 인조의 모습을 보는 것 같아 안타깝습니다.

자신의 발언에 책임을 질 수 있는 민주의식을 갖춘 나라를 위해서

우리가 삼전도의 굴욕을 한 번 생각해볼 필요가 있을듯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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