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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감성소년 Apr 09. 2022

오늘의 역사는? 4월 10일(곽재우)


반갑습니다 ! 갬성입니다! 오늘의 인물은 바로!








곽재우입니다! 오늘 4월 10일은 곽재우 장군의 기일 입니다 ! 홍의장군 곽재우에 대해서 알아보시죠!




1. 그의 순탄치 않은 초중년의 삶


곽재우는 양반 관료 집안의 자식이었습니다.


할아버지 곽지번은 부사, 아버지는 중앙 관료(승지) 및 지방 관찰사(지금의 도지사)까지 한


유력 가문이었습니다. 그는 이후 조식의 사위인 김행의 여식과 결혼하게 되여 북인(실용적, 개혁 추구+부국강


병)으로 분류되었고 자신의 숙부 곽규로부터 제자백가서와 성리학을 공부하였다고 합니다.


18살 이후부터 과거를 준비한 그는 32살에 2등으로 합격했지만 답안에 불손한 내용이 있다하여 탈락했다고 


하네요..


그리고 이후 33살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36살까지 3년상을 차립니다. 그 과정에서 시험을 포기하고 의령에 칩


거하였다고 하네요.




2. 왜란의 시작과 홍의장군 전설의 시작


1592년 4월, 일본이 침략해옵니다. 속수무책으로 무너지고 있던 조선의 모습을 본 곽재우는


칩거생활을 멈추고 자신이 소유하고 있던 노비들을 무장시켜 의병으로 만들었다고 합니다.


개전 후 10일만에 편성된 의병이었습니다. 이후 점차 의병 수를 확대한 그는 결국 1년 후에는 2천명에


가깝게 유지했다고 하네요.


그리고 그의 맹활약이 시작됩니다. 그는 정암진전투가 그 첫전투였죠.


5월 23일 개전한 후에 1, 2군이 각각 한양을 점거, 평안도, 함경도로 진출했을 때, 관군들은


아무런 대응도 하지 못했습니다. 이런 병력 공백 상황을 곽재우등의 의병이 해결했습니다.


그 첫 시작이 정암진전투였습니다. 고바야카 다카카게가 이끄는 제 6군은 호남지역으로 진출하고자


했습니다. 그 중간 길에 딱 곽재우의 활동지인 의령이 있었고, 의령과 전라도의 사이에 정암진이란 길이 있었


습니다.


이 곳은 갈대밭과 늪지, 절벽이 많아 왜군들이 이동하기가 불편했습니다. 이에 왜군들은 선발대를 파견하여


깃발을 미리 꼽아 이동경로를 쉽게 알아차릴 수 있게 했습니다. 이를 확인한 곽재우군은 이 들의 깃발을


새벽에 몰래 뽑아, 조정하여 늪지 쪽으로 유인하게 하였습니다. 이 후 고바야카의 본대는 이 곽재우의 계책에 


말려 패배를 하고 퇴각을 하였습니다. 곽재우는 2000여명의 일본군에 맞서 수적 열세를 극복하기 위해서 자


신이 입는 홍의를 부하 다수에게 입게하여 상대적으로 수가 많아보이게 착각케하는 기묘한 술책을 썼다고 합


니다. 이후 고바야카와는 이 전투에서 패한 후 병력을 대규모로 증강하여 전라도 진출을 시도하였지만


권율과 황진장군(조선의 조자룡)의 지도하에 있는 조선군에게 대패하여(웅치, 이치 전투-일본군 1만VS 조선


군 1천) 전라도 진출이 좌절되었다고 합니다.


이후 곽재우는 경상도 각 지에서 유격술을 통해 적군의 후방을 교란시켰으며


1차 진주성 전투에서도 후방을 공격하여 1차 진주성 전투에서 조선군이 승리하게 하는데 크게 기여했습니다.







3. 그의 완고한 성격과 이후 그의 행적



그는 이후 각종 벼슬을 받았다고 합니다. 하지만 그는 거의 대부분 기존의 관료들과 마찰이 생겨


관직을 내려 놓기가 일수였습니다. 보통은 자신이 옳다고 생각하는 것에 대해서 밀어부치는 성격이었고


보통 그의 말은 다 맞기 때문에 따르면 좋았지만, 성리학 사회인 조선에서 상관들은 이를 받아들이기가 힘들


었 던 것으로 보입니다. 정유재란이 일어난 후 얼마 뒤 1597년 그는 계모 허씨가 별세하자 더 이상 전투에 참


여하지 않고 상을 치뤘습니다. 이 도중에 왕이 수차례 다시 거병하라는 명을했지만 '상 중이니 할 수 없다'고 


말하며 왕명을 거절했다고 합니다.[ㄷㄷ]


그러다 전 후에도 수 차례 벼슬을 수여하였으나 모두 거절하고 곽재우는 산에서 은신하다가 1617년에 세상


을 떠났습니다.






4. 그에 대한 나의 생각

곽재우는 정말 대단한 사람입니다.


나라의 위기 상황에서 자신의 전재산을 털어서 의병을 일으켰다는 것 자체가 대단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


다. 전투 한 번 제대로 준비하지 않았던 그가 이렇게 훌륭한 전공을 획득한 것은 그가 대단한 전투적 재능을 


가지고 있음과 동시에 얼마나 전투에 필요한 실용적인 전술을 획책하는 능력이 있었는지를 알 수 있는 대목입


니다( 편견이긴 하지만 북인들은 대부분 멋있습니다.)



그의 활약을 보면 지금 우크라이나의 젤렌스키 대통령이 생각이 납니다. 자신이 가진 것이 많은 사람이고 충


분히 더 안락한 삶을 살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젤렌스키 대통령은 미국에 탈출 권유를 들었지만 '나에게 필요


한 것은 차가 아닌 탄약이다'라 말하며 거부)


조국을 위해 싸운다는 점에서 말입니다. 이런 노블리스 오블리주를 선택한 그의 기개와 용기, 그리고 전투 능


력. 우리가 본받아야 하지 않을까요. 흔히 요즘 사람들은 '배워서 남주냐'란 말을 합니다 하지만 전 반대로 생


각합니다 '배워서 남을 줘야된다'라 말입니다


그 것이 성공의 주 법칙이라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모든 우리가 생각하는 상품, 서비스는 인간의 편리를 도모


하는 것입니다.


그 것은 결국 타인의 안락과 평안을 어떻게 도모하는 지에 대한 치열한 생각이 만든 이기와 서비스일 것입니


다. 결국 지식은 타인을 진정 위해야만이 제대로 발휘할 수 있고, 이 것이 성공으로 이어질 것이라 믿습니다.



그 것을 제대로 보여준 곽재우! 배워서 남준다는 것을 제대로 보여준 소신있는 그의 모습을 우리는 기억해야


하지 않을까요?



이상으로 글 마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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