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갑습니다 갬성입니다!
오늘의 역사는 한산도 대첩입니다!
이런 와중에 그나마 전쟁 준비를 했었던 이순신. 그는 이런 사태를 미리 감지했고 군사들에게 화포 훈련을 시켰고 동시에 거북선 제조등 군함 제조에 힘썼습니다. 사실 이순신이 맡고 있던 전라 좌수영은 서남해안을 방어하고 있는 경상, 전라 좌우수영 중 가장 열악한 환경이었습니다. 하지만 이순신이 부임한 이후로 각 수영을 돌아다니며 순찰을 강화하였고, 훈련을 잘 한 장수에게는 포상을, 못한 장수에게는 엄벌을 내림으로서 기강을 바로하였습니다. 이 결과 제대로 전선으로 활용할 수 있는 병선이 총 40 중 5척도 안되는 수준에 있었던 전라 좌수영은 임진왜란 발발 후 옥포해전에서 26척을 출전시킬 수 있을 정도로 만들어 놓습니다. 그리고 임진왜란이 발발하지요
임진왜란은 그야말로 최악이었습니다. 계속된 패전이 지속되고 있었기때문입니다. 조선 경상 우수사 원균과 좌수사 박홍은 자신이 갖고 있던 총합 100척에 가까운 판옥선을 모두 침몰시키며 빤스런을 합니다. (역시 원균)
육군 역시 동래성에서만 그럴듯한 저항이 있었고 그 이후엔 그냥 한양까지 밀렸고 결국 수도를 20일만에 내줘버립니다. 이 암울한 상황에서 가토 기요마사는 두 왕자까지 포로로 잡혀있는 암울한 상황이었습니다.
그런 와중에 최초의 해전인 옥포해전에서 대승을 거두고 점차 서남해안권의 제해권을 장악해가고 있었습니다 그런 와중에 기존에 왜구들은 자신들의 수륙병진 정책을 상실할거란 두려움에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명령하에 당시 최고의 수군 제독이었떤 구키 요시타카를 포함한 명장 와키자카 야스하루를 모아 일거에 이순신의 함선을 박살내란 명령을 합니다. 하지만 이미 육전(용인전투)에서의 엄청난 승전을 통해 자신감이 만땅이 된 와키자카 야스하루는 자신의 공이 온전해지길 바라는 마음에 단독 행동을 하게 되었고 그는 바로 이순신을 잡으러 견내량으로 향합니다.
일본에서 7장이라 불리는 와키자카 야스하루는 용인전투에서 5만의 조선 대군을 1600으로 격파한 용장이었다.
견내량은 지금의 통영과 거제 사이에 있는 좁은 해협으로 폭 400~500m, 길이 3m정도의 좁은 해협이었습니다. 그래서 판옥선과 같은 대형선들이 활동하기에는 굉장히 어려웠습니다. 더군다나 물살이 굉장히 빠르기 때문에 조선의 판옥선 보다는 일본의 세키부네가 활동하기 좋았습니다 세키부네는 그 폭이 좁고 가벼워 빠르게 이동하여 근접전하기 좋은 배였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세키부네는 견내량에 있는 이순신의 함선들을 봅니다. 아니나 다를까 세키부네는 일제히 이순신 함선을 공격하려 접근합니다. 근데 이순신 함선들이 일제히 후퇴하기 시작합니다. 왜선들은 신이나서 따라갔습니다. 그러다가 갑자기 도망가던 이순신의 함선들이 일제히 유턴을 합니다. 그리고 주변 섬에 매복하고 있던 판옥선들이 나타납니다.
판옥선은 마치 학이 날개를 펴는 듯한 모습을 취한 일명 학익진을 펴면서 일제히 함포사격을 했습니다. 이에 일본 전함들은 어쩔 줄몰라하다가 결국 와키자카 야스하루의 명령을 받고 일제히 돌격합니다. 하지만 판옥선의 엄청난 화포사격을 뚫기란 힘들었습니다. 결국 총70척에 가까운 적함선 중 59척에서 63척의 배가 격침되었고, 약 1만여명의 전사자가 발생했습니다. 적의 수장 와키자카 야스하루는 남은 14척의 배를 이끌고 김해 방면으로 도주하였다고 합니다. 이 때 놀라운 것은 조선 수군의 경우 단 한 척의 배도 잃지 않았습니다.
이로서 서남해안권의 제해권을 완전히 장악한 이순신은 곧이어 선조의 명령을 받아 부산포해전에서 470척이 정박되어 있는 부산포를 공격하여 적함선 100척을 격침시켰습니다. 이는 당시 임진왜란 시기 일본의 본진이었던 부산포를 공격하여 더 이상 물자수송과 병력 수송을 원활하게 하는 것을 방지하고 동시에 히데요시가 초기에 세웠던 수륙병진정책을 좌절시키는 효과도 있었습니다. 이 것은 결과적으로 평양성에 있던 고니시의 병력이 고립되게 하는 효과가 있었고 결국 조명연합군에 의해서 평양성을 되찾게 되는 효과를 보는 것도, 이순신 승리의 간접적인 영향이었습니다. 그리고 이 때부터 히데요시는 전군에게 '조선 수군은 무조건 피해라'고 명합니다. 동시에 독단적인 행동을 한 와키자카 야스하루도 벌로서 자신의 부장들을 참수당하게 되죠. 여담으로 야스하루는 패배 이후 섬에서 몇일 머물렀다고 합니다. 조선 수군이 해안을 순시하는 가운데 그는 먹고 살기 위해서 미역으로 20여일을 버텼다고 하는데요. 그래서 그의 후손들은 그의 제사 때 꼭 미역을 올린다고 하네요.
이순신은 그야말로 성웅이었습니다. 미리 전쟁이 일어날 것을 대비하고 있었고, 그 것을 체계적으로 준비한 결과 임진왜란 시기 23전에서 23승을 할 수 있게 되었죠. 그는 언제나 군사들을 최소한으로 잃기 위해서 전략을 치밀하게 짰었고, 부장들의 의견을 충실하게 수용했습니다. 비록 혹독한 훈련으로 불만을 가진 병사들은 많았으나 그 것이 전쟁이 터진 이후에 제대로 효과가 발휘됨으로서 그 불만은 사그라들게 되었습니다. 그는 근접전에서 조선이 압도적으로 불리하다는 것을 알고 수중전을 선택했고, 끊임없이 훈련한 결과 자신이 주도했던 23전의 전투에서 단 한척의 판옥선도 잃지 않았습니다. 더군다나 그는 신분에 관계없이 조선 수군 내에서 실시한 과거제로서 능력주의에 입각하여 인재를 등용하였고, 그 인재들에게 적절한 보상을 줌으로서 모든 사람들이 충성을 하게 했습니다. 그에 반면 선조는 훌륭한 장수를 둠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서 끊임없이 의심하고 결국 죄없는 의병과 장수들을 벌주었고 그 과정에서 실제로 김덕령이란 의병장은 목숨을 잃기도 했습니다. 원균 또한 마찬가지죠. 이순신과 같이 전쟁을 치루면서 이순신이 병사들의 피해를 최소화하는 것을 걱정한 것에 반해서 원균은 적군의 수급을 가져가는 것에 몰두하였습니다.
그 결과 원균이 파직된 이순신의 자리를 메웠을 때 칠전량해전이란 세계사적으로 가장 쪽팔리는 전쟁 결과를 얻습니다. 이렇듯, 역사는 죽어있는 역사가 아닙니다. 어떤 상황에서 어떤 태도로 임하는 어떤 사람이 행할 때 어떤 결과를 야기할 수 있다는 것을 잘 보여줍니다. 과연 현재 원균같은 사람이 없을까요? 이순신과 같은 사람이 없을까요? 선조와 같은 사람은 또 없을까요? 우리가 역사를 배우는 이유는 그러한 상황, 원균과 선조와 같은 인간들이 주요 요직에 앉아 국가를 엉망으로 만드는 일이 없게하기 위함입니다. 오늘은 우리의 성웅 이순신이 한산도에서 대승을 거둔 날입니다. 오늘날 우리가 그의 행적을 기억하는 것은 그가 사랑했던 조선, 그리고 조선사람들을 지키려는 그의 진심이 오늘날에도 전해지기 때문이라 생각합니다. 부디 위정자들이 모두 이순신과 같은 애민정신을 가지길 기원하며 글을 마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