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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감성소년 Jul 24. 2022

오늘의 역사는?7월24일(대한제국군대해산)


반갑습니다 갬성입니다! 


오늘의 역사는 군대강제해산입니다! 




1.배경


러일전쟁

러일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은 한일의정서를 체결한 이후 본격적으로 대한제국을 식민지화합니다. 한일의정서를 통해 군사요충지와 경제 기반 시설을 사용할 있게 되었고 어업권까지 차례대로 가져간 후 을사조약을 체결했었죠. 그리고 이에 대해서 헤이그 특사를 파견한 고종을 강제 퇴위시킨 후 일본은 그나마 남아있던 대한제국의 통치권을 모두 뺐게 됩니다. 이 것이 바로.. 한일신협약이죠. 


강제퇴위되었던 고종, 그리고 순종



2. 한일신협약 내용


정미 7조약이라 불리는 이 조약은 총7개항으로 되어있습니다. 주요내용은 아래와 같습니다. 이는 1907년 7월 24일 이완용과 이토 히로부미의 명의로 체결 조인하였습니다. 




 ① 한국정부는 시정개선에 관하여 통감의 지도를 받을 것,


 ② 한국정부의 법령제정 및 중요한 행정상의 처분은 미리 통감의 승인을 거칠 것,


 ③ 한국의 사법사무는 보통 행정사무와 이를 구분할 것, 


④ 한국고등관리의 임명은 통감의 동의로써 이를 행할 것, 


⑤ 한국정부는 통감이 추천하는 일본인을 한국관리에 용빙할 것,


 ⑥ 한국정부는 통감의 동의 없이 외국인을 한국관리에 임명하지 말 것, 


⑦ 1904년 8월 22일 조인한 한일외국인 고문 용빙에 관한 협정서 제1항은 폐지할 것 등이다. 




또, 일제는 조약의 후속조치로 행정실권을 장악하기 위해 한국인 대신 밑에 일본인 차관을 임명하고, 경찰권을 위임하도록 하였으며, 경비를 절약한다는 이유로 한국군대를 해산하였다. 




참조항목


[네이버 지식백과] 한일신협약 [韓日新協約] (두산백과 두피디아, 두산백과)



이 정미7조약은 법령 제정권, 관리임명권, 행정권 및 일본관리의 임명등을 한 내용으로 일명 '차관 통치'라 불리는 단계에 접어들게 됩니다. 이로서 대한제국의 주체였던 황제는 그 어떠한 권리도 갖지 못하는 상황에 이르게 되었고, 대한제국은 식물국가가 되어버렸죠. 그리고 마지막 글에 나와있지만 한국군대를 해산시켜버리는데요. 이는 대한제국의 마지막 주권을 없애는 것과 마찬가지였습니다. 







3. 대한제국의 군인들 대한의 의병으로 


정미의병 발원 터


일제의 강제 군대 해산은 엄청난 반발을 야기했습니다. 이에대해 첫날부터 바로 완강한 저항이 일어났는데요... 특히 남대문과 창의문 일대에서 벌어진 제1연대 제1대대와 제2연대 제1대대 장병들의 저항은 한국 군인들의 항일 투쟁 중 가장 빛나는 것이었습니다. 특히 대대장 박승환의 자결은 대한제국 군인들의 저항정신을 야기했습니다.  무기를 해제하고 훈련원에 가려고 영문을 나서려던 장병들은 대대장 자살을 신호로 일제히 무기고를 부수고 그들을 인솔하던 일본 교관에게 총부리를 돌리며 봉기하였습니다.

봉기군을 진압하기 위해 기관포로 무장한 일본군 제51연대 소속 3개 대대 병력이 투입되었고, 이를 맞아 한국군은 병영을 중심으로 방어진을 펴고 무려 4시간 이상이나 장렬한 전투를 계속하였지요. 



이충순 열사는 대한제국 군인으로서 마지막까지 항전하다 체포 직전 자결하였습니다. ㅠ




이와 같은 애국적인 항일 투쟁은 지방 진위대의 해산 시에도 나타났습니다. 원주 진위 대장 홍우형은 부하 병사들이 항일 봉기에 나설 것을 종용하자 겁을 먹고 도망하였습니다가 일본군을 인솔하고 자기 부대를 진압, 해산하려고 되돌아왔습니다.


그런데 같은 진위대 특무 장교 민긍호는 부대의 전 병사 250명을 지도하여 일본군과 맞서 싸웠으며 이후 관동의병의 핵심 세력이 되었습니다. 


강화진위대는 서울로부터의 해산 소식을 듣고 강화의 자강회(自强會) 회원과 협력하여 유명규(劉明奎)·연기우(延基羽)·지홍윤(池弘允) 등이 중심이 되어 장교들의 제지를 뿌리치고 일본경찰주재소를 습격하여, 일본 순사를 사살하고 악명 높은 일진회(一進會) 총무인 정경수(鄭景洙)를 총살하였으며, 이후 해서 지방과 경기 지방 의병의 중추가 되었습니다. 이 들은 의병전쟁에 합류하여 의병의 무기가 현대화하는데 기여하였고, 나아가 의병들은 13도 창의군을 창설하고 서울진공작전을 감행하게 됩니다. 




[네이버 지식백과] 군대해산 [軍隊解散]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4. 하지만


일제는 대규모 의병운동을 진압하기 위해서 엄청난 수의 군인들을 한반도에 투입하였습니다. 결국 1910년대되면 의병 전쟁은 차츰 활동 수가 줄어들게 되었고 만주지역으로 이동하여 활동했다고 합니다. 이후 일제는 서서히 대한제국의 정치, 사회, 문화면으로 장악을 위한 시도를 합니다. 언론탄압을 위한 '신문지법', 집회와 결사의 자유를 박탈하기 위한 ‘보안법’이 공포되었지요. 





  





결국 대한제국은 1910년 8월 강탈되게 됩니다. 하지만 이러한 과정에서 있었던 밑으로부터의 저항은 이후로 계속 이어져 3.1운동 그리고 임시정부 설립등으로 이어지게 됩니다. 35년이란 긴 식민지 기간 동안 체계적으로 독립운동을 할 수 있었던 것은 바로 일제 침탈기부터 있었던 자주적인 저항이 그 기반이라고 생각합니다. 이 밑으로부터의 저항 정신은 광복 후에도 이어져 4.19혁명, 518민주화운동, 6월항쟁, 2016년 촛불혁명으로 이어졌다고 생각합니다. 



오늘은 그 밑으로부터의 혁명의 시작점이라 할 수 있는 정미의병. 그 정미의병을 야기하게한 군대해산이 있었는지 115년이 지난 해입니다. 마지막까지 국가의 주권, 군사권을 뺏기는 것을 막기위해 자살로서 저항했던 박승환 장군, 그리고 끝까지 저항한 대한제국 제 1연대, 2연대의 군인들. 그 들을 생각해보는 시간을 가지는 것은 어떨까요? 갬성이었습니다! 




참조항목


[네이버 지식백과] 한일신협약 [韓日新協約] (두산백과 두피디아, 두산백과)



“군인으로서 나라를 지키지 못하고 신하로서 충성을 다하지 못하였으니, 만번 죽은들 무엇이 아깝겠는가."
(軍不能守國 臣不能盡忠 萬死無惜)-선생의 유서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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