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열단의 대원이자 민족시인이자 계몽운동가였던 이육사

by 감성소년

이육사. 그의 실제 이름은 이육사가 아니다. 그의 실제 이름은 이원록. 이육사란 이름은 자신이 처음 감옥에 수형되었을 때, 죄수 번호이다. 자신의 죄수 번호를 자신의 활동명으로 개칭하여 사용할 정도로 그가 얼마나 일제의 지배 형태에 대해서 저항적이었는지 잘 알 수 있는 대목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육사란 이름으로 활동했던 시인 이원록을 기억할 것이다. 그런데 이번에 조선의용대를 공부하면서 깨달은 사실이 있다. 그는 단지 저항 시인만 했던 것이 아니었던 것이다. 놀랍게도 그는 실제로 의열단원이었던, 레지스탕트였던 것이다. 한 만디로 자신의 모든 것을 독립운동을 위해 희생하셨던 이육사. 그 숭고한 삶에 대해서 알아보겠다.


그는 1904년 경북 안동군 도산면 원촌리에서 태어났다. 12살이 되었을 떄, 얘안보문의숙에서 한학을 배웠고, 17세에 대구로 이사하여 교남학교에서 신학문을 배웠다고 한다. 1923년에는 일본 동경에 유학생활도 하였다. 그러다 25년 귀국한 후 운명적인 사건이 일어난다.




그 것은 윤세주의 의열투쟁을 본 것이다. 윤세주는 3.1운동 당시 밀양에서 운동을 주도하다가 의열단에 가입하였고, 이후 동양척식주식회사, 조선총독부등을 폭발시키려는 작전을 계획하다 탄로나 대구에서 옥고를 치루고 있었다. 이 때 이원록은 그의 행동을 보고 큰 감명을 느껴 자신의 형 이원기, 동생 이원유와 함께 의열단에 가입하게 되었다. 그가 의열단에 가입한 이후 1927년에 조선은행 대구지점 폭파사건이 일어났는데, 이 사건과 연류되어 이원록은 옥고를 치루게 되었다. 그가 이 때 수감된 미결수 번호가 264번이었는데 이 수감번호를 평생 호로 삼아서 사용하였다고 한다. 얼마나 그가 이 시기 이후로도 일제에 대한 저항정신을 갖고 있었는지 보여주는 대목이다. 이후 대구 폭파사건의 실제 주동자였던 장진홍이 붙잡히게 되자 그는 풀려나게 되었는데 그 옥고 기간이 2년 4걔월이라고 한다. 비록 의열단에 가입하였지만 아무런 물증도 없는 상태에서 모진고문을 가했던 상황을 보아도 '조선인들을 문화적으로 대하겠다'는 문화통치의 허상이 확인되는 면이 보이는 것 같다. 1929년에는 광주학생항일 운동이 일어났을 때 붙잡혔으나 증거불충분으로 풀려났고, 만주사변 이후에는 심양에서 김두봉을 만나 독립운동 방략을 논의하고 귀국하였다고 한다.

조선은행 대구지점 폭파사건 이후 수감되었던 이육사. [출처:나무위키]



1932년 그는 중국 북경에 가서 중국의 신문화운동의 중심점이었던 루쉰을 만나게 되었고, 그의 작품을 번역하는 활동을 하기도 했다. 이 후 이 곳에서 이육사는 김원봉이 창설한 조선군관학교에 입교하였다. 여기서 그는 군사훈련과 정치, 경제 등을 공부하였고, 이육사의 경우 33년 수료한 후에 신의주등지에서 조선군관학교에 입교할 인재를 모집하고, 국내 정세를 염탐하는 비밀임무를 띄고 활동했으나 결국 붙잡히게 되었다. 하지만 그는 증거불충분으로 곧 풀려나게 된다. 이 과정에서 선생의 몸이 많이 악화되어 그는 무장독립운동을 계속 지속할 것인가에 대해서 고뇌를 하기 시작했고, 결국 계몽운동으로 그 방향을 전화하게 되었다. 그는 문학활동을 통해서 독립의식을 고취하는 형태로 독립운동을 전개하였는데, 그가 아무래도 직접적으로 의열단등 가장 적극적인 독립단체에 있었던 사람인 만큼 그의 시에는 적극적이고 진취적인 저항정신이 가득하다. 그의 대표작을 하나 소개하고자 한다.

중국의 신문학운동, 백화문 소설의 거장 루쉰. 그로부터 문학적 영향을 받았다는 이육사. [출처: 나무위키]

광야(曠野) _이육사




까마득한 날에


하늘이 처음 열리고


어데 닭 우는 소리 들렸으랴




모든 산맥(山脈)들이


바다를 연모(戀慕)해 휘달릴 때도


차마 이곳을 범(犯)하던 못하였으리라




끊임없는 광음(光陰)을


부지런한 계절(季節)이 피여선 지고


큰 강물이 비로소 길을 열었다




지금 눈 나리고


매화향기(梅花香氣) 홀로 아득하니


내 여기 가난한 노래의 씨를 뿌려라




다시 천고(千古)의 뒤에


백마(白馬)타고 오는 초인(超人)이 있어


이 광야(曠野)에서 목 놓아 부르게 하리라



오솔길문향 | 이육사_광야(曠野) - Daum 카페[출처]





위의 시에도 볼 수 있다 싶이 윤동주의 시에 비해서 굉장히 진취적이고 적극적인 성향이 강하다. 그의 시에는 암울한 조국의 현실에도 좌절하지 않고, 기어코 조선 독립을 쟁취하겠다는 의지가 담겨져있다. 그의 시에는 여태껏 그가 살아왔던 삶이 고스란히 잘 녹아져있는 작품들이 많다. 놀라운 것은 그가 17번의 옥고를 치루면서도 이런 시를 썼다는 것이다. 당시 생계가 힘들어서, 또는 그냥 물질적인 이유로 최남선, 서정주등이 태평양전쟁을 찬양하는 시를 썼던 것을 감안하면 그의 정신이 얼마나 숭고한지 알 수 있다.


그런 그는 42년 북경으로 갔다가 모친의 소상으로 귀국을 했는데, 이 때 일제가 체포하여 북경으로 이송하였고 44년 1월 16일 북경감옥에서 임종하였다.





평생을 독립운동가로 살았던 그의 삶. 이원록이기보다, 수감번호였던 이육사로 살고자 했고, 그에 맞게 마지막까지 사람들에게 민족의식을 자극하고자 했던 이육사. 1940년대 수 많은 민족운동가들이 변절하는 가운데 그는 꿋꿋하게 자신의 영역에서 마지막까지 자신의 자리를 지키고자 했고, 독립운동을 위해서는 무장독립투쟁, 의열투쟁, 계몽운동의 영역을 가리지 않았던 이육사. 오늘 날 그의 삶은 목표를 성취하기 위해서 정말 최선을 다하는 성취적인 모습과 동시에 조국에 대한 애국심이라는 감동을 주는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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