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24일 동해항에서 강원도와 동북아평화연대, 두원상선등이 러시아 연해주에 살고 있는 고려인등을 위해 코로나 19방역용 마스크 10만 장을 실어보내었다. 이는 우수리스크시 시의회 의장의 요청으로 이루어졌다.
근데 내가 말한 위의 우수리스크란 지역은 굉장히 특별한 지역이다. 그 것은 권업회등 연해주에서 독립운동을 한 대표적인 독립운동가 최재형선생님의 생가가 있던 곳이기 때문이다. 최재형선생님은 1910년대 러시아 연해주에서 독립운동의 기반을 마련하게 해준 대표적인 인물이다. 최재형 선생님의 경우 김경천 장군, 김두봉등과 같은 독립운동가와 비슷하게 잘 알려져있지 않은 독립운동가이다. 그래서 나는 이 최재형 선생님의 위대한 업적에 대해 알아보고자 한다.
연해주 독립운동가 최재형. 2018년에 세워진 그의 동상. (발췌 국민일보)
최근 2018년 연해주 우수리스크에서는 최재형 선생님의 서거 100주년을 기념하여 그의 흉상이 세워졌다. 솔직히 이 흉상이 세워진다는 말을 들었을 때, 그가 어떤 활동을 했는지 잘 몰랐었다. 하지만 그에 대해서 조사하면 할 수록 그가 정말로 대단한 사람이라는 것을 알았다.
그는 어린 시절 너무 가난하여 해주로 이주했다고 한다. 그 이후부터 그는 생계를 유지하기 위해 닥치는 대로 일을 했다고 한다. 러시아에 가서도 이주를 꽤 많이 했다. 연추(얀치헤, 현재 추카노프카)마을로 이사하였다가, 20세에는 일제 침략으로 인해서 노보키예프스키(현재 크라스키노)로 이사하였고, 다시 1910년에는 슬라뱐카로, 마지막에는 우수리스크로 이사하였다. 무려 4번이나 이사를 하였던 것이다. 그렇게 혼란스러운 와중에도 그는 학업을 놓지 않았다. 소년시절 러시아상선 선장 부부의 도움으로 러시아학교에 입학한 첫 한인 학생이 되었다. 그는 선원생활을 하면서 동시에 학업을 하면서 폭넓은 견문과 경험을 축적하고 있었다. 78년 이후 조선과 러시아의 국경에서 통역으로 일을하였고, 연추남도소의 러시아어 서기로서 3년간 사무처리를 하기도 한다. 그는 통역으로 일하는 동안 러시아인들과 많은 접촉을 하며 신뢰를 쌓아갔었다. 그런 와중에 그는 처음으로 연추남도소의 도헌에 임명되었다.이후 그는 교육계몽 사업에 관심을 들이면서 재러 한인에 대해서 교육운동을 하였다. 그 와중에 그는 계몽사업을 효율적으로 운영하기 위해 건설청부업과 상업활동을 했으며 이를 바탕으로 많은 부를 축적하게 된다. 특히 의화단 사건, 러일전쟁 과정에서 큰 부를 축적하였다. 그런 그는 1905년 을사조약 체결과 박영효의 요청으로 동경을 갔다 온 이후로 국권회복운동에 적극적으로 나서게 되었다. 첫 스타트는 계몽운동이었다. 블라디보스토크에 계동학교를 세우고 민족교육에 힘쓴 것이다. 이후 간도관리사였던 이범윤과 연락을 하며 독립운동에 힘쓴다. 그 후 그는 국권회복운동을 하기 위한 동의회를 조직하였으며, 이 운영 경비에 대한 지원의 대부분을 하게 된다. 이 동의회 소속이었던 이범윤은 연해주의병을 이끌고 두만강 하류에 있는 일본 소규모 부대를 궤멸시키기도 했다.
해조신문이 기록된 동의회 취지서
하지만 이후 의병활동은 국내진공작전의 실패, 일제의 러시아에 대한 압력과 이범윤과의 갈등으로 인해서 무장투쟁의 비중은 줄어들고 강점 이후, 계몽운동으로 선회하게 되었다. 대표적인 그의 이 시기 계몽운동으로 '대동공보'라는 한글 민족지의 사장으로 취임하여 러시아 지역 한인 사회에 대한 소식, 국내 소식, 러시아의 한인 배척과 재러한인의 대응 등에 대해 알렸다. 하지만 이는 일제의 요청에 따른 러시아의 탄압에 의해 폐간되었다.
하지만 이 후에도 그의 독립운동은 그치지 않았다. 1911년 연해주 지역에서 최초로 러시아당국의 공식인가를 받은 '권업회'가 발촉되었는데, 이 때 회장으로 선출된 것이 최재형이었다.
권업회
하지만 1차대전이 일어나고 부터 그의 비극이 시작된다. 1차대전, 러시아와 일본은 같은 연합국의 일원으로써 친선관계가 유지되었다. 이에 일본에서 28명의 추방을 러시아측에 요구를 했고, 이 때 최재형도 러시아 헌병대에 체포되어 니콜스크-우수리스크로 압송되었지만, 결국은 11일째 되는 날 석방되었다. 그 후 그는 3.1운동 당시, 대한국민의회가 독립선언서를 발표했을 당시, 외ㄱ부장으로 선임되었으며,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재무총장으로 선출되었었다. 하지만 1920년 일본은 소비에트 적군에 대해 공격을 했었고, 이 과정에서 일제에 체포되어 총살당하였다.
그는 마지막 순간, 동료들이 피신하라고 간청하였지만, '만일 내가 몸을 숨기면 일본군은 엄마와 너희들에게 잔인한 고문을 가할 것이다. 나는 일본군이 어떻게 아이들을 가혹하게 다루었는지 보았고, 그들의 규율을 알고 있단다. .나 자신을 구하기 위해서 위험 속에 너희들의 목숨을 내 맡길 수는 없다. 나는 오래 살았고 너희들을 위해서 목숨을 바칠 수가 있다'고 말했다고 한다.
최재형 선생님의 생가
이 때까지 최재형의 일대기에 대해서 알아보았다. 최재형은 우리에게는 잘 알려져있지 않은 독립운동가이다. 하지만, 1909년 안중근의 하얼빈 의거에도 지원을 해준 인물이며, 1910년대 연해주의 독립운동가들의 재정적인 지원을 해준 인물이다. 하지만 정말 대단한 것이, 그의 경우 원래 태어날 때부터 부유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자신은 어릴 때, 홍수등으로 인해서 굶어 죽을 상황에 놓였지만, 통역, 상업등 온갖 일을 통해서 결국은 사회, 경제적 지위를 얻은 사람. 이 부분만 봐도 자수성가했다는 면에서 너무 대단하다. 하지만 여기서 그치지 않고, 계몽운동에 헌신하였으며, 일제의 국권침탈이 본격화되는 시기인 을사조약 이후에는 무장독립단체의 재정적 지원을 담당했던 인물이기에, 그의 애국심을 확인할 수 있는 부분이다.
여기서 필자의 개인적인 사견을 붙이자면 이렇다. 그가 만약 어릴 때부터 유복한 과정이었다면, 이 모든 행위들이 가능했을까? 물론 이회영같이 명문집안에서 독립운동을 한 케이스도 있지만, 개인적으로는 최재형의 경우는 아닐 것이라고 본다. 왜냐하면, 최재형의 경우 자신이 본격적으로 돈을 벌었던 시기가 의화단운동, 러일전쟁이었고, 이 때 군수물자와 군인들에 대한 생필품을 운반하면서 성장하였다. 이 과정에서 분명히 무수한 민간인들이 전쟁으로 겪는 참상을 확인했을 것이고, 조선 반도에서 일어나고 있는 타국간의 전쟁에서 피해를 보는 민간인들에게 자신으 어릴 적의 가난함등으로 인한 고난에 대해 감정이입 했을 가능성이 높다. 거기서 우러나온 진심어린 애국심이 아니었을까 싶다.
삶은 이렇게 다양하다. 어렵게 돈을 모은 이가, 자신의 평생과 자신의 목숨까지 독립운동에 기여한 이런 드라마틱한 일이 있기도 하다. 우리가 아직 익숙하진 않지만, 최근에 이회영이 교과서에 나오는 등 여태까지 사회주의 독립운동가라는 이유로, 직접적인 독립운동이 아니었다는 이유로, 또는 자료 부족의 이유로 소외되었던 독립운동가들이 다시 부각되는 시점에서 다시금 최재형의 이 드라마틱한 독립운동이야기, 자수성가한 이가 독립운동을 위해 노블리스 오블리제를 실천한 이 따뜻한 이야기가 많은 사람들에게 기억이 되었으면 하는 바람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