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의 노래 - 김훈
"눈으로 본 건은 모조리 보고하라. 귀로 들은 것도 모조리 보고하라. 본 것과 들은 것을 구별해서 보고하라. 눈으로 보지 않은 것과 귀로 듣지 않은 것은 일언반구도 보고하지 말라. 나는 우수영으로 돌아가는 망군 편에 안위에게 그렇게 일렀다. 우수영에 남은 안위에게 무명 두 필과 쇠고기 다섯 근을 상으로 보냈다. 적들의 기별은 오지 않았다."
2009년 회사에 복귀했을 때 회사의 경영상황이 너무나 어려운 상태였다. 외부적으로 자동차 소비시장은 꽁꽁 얼어붙어 있었고, 내부적으로 고질 재고는 엄청나게 야적장에 쌓여있었고, 강성 노조의 목소리는 그 어느 때보다 높았다. 그해 언론매체에 우리 회사는 매우 자주 노출되었다.
부채율이 800%니, 1000%니 하는 머릿속으로 계산하기도 어려운 숫자들이 쏟아져 나왔다. 주식시장에서 회사 주가는 곤두박질쳤고, 월급이 몇 달씩 안 나오기도 했다. 그렇게 워크아웃이 시작되었고, 내가 몸담고 있는 건물의 연구원들이 한둘 떠나기 시작했다. 마치 함몰하는 거대한 전함에서 생쥐들이 살기 위해서 우르르 이동하는 것처럼 느껴질 정도였다. 가만히 있는 나 자신이 바보 같아 보이기까지 했다.
그즈음, 김훈 선생님의 '칼의 노래'를 읽어보게 되었다. 평상시에 이순신 장군에게 그렇게 관심이 높았던 것은 아니었다. 고작 어린 시절 보았던 위인전의 이야기가 그분을 이해하고 있는 전부였을 것이다. 그런데, 칼을 노래를 읽어 보면 '인간' 이순신이 느껴진다.
부산을 거점으로 한양까지 도성은 순식간에 함락되고, 왕은 피난을 떠나게 된다. 훈련이 안된 수군, 절대적으로 부족한 군량, 몇 척 되지도 않은 전함, 지속적인 탈영, 군량미 절도까지... 리더의 위치에서 최악의 상황이다. 게다가, 임금조차도 이러한 이순신을 믿지 못하여 끊임없이 그의 생활을 모니터링한다. 그가 모반을 할 가망성이 있다고 판단이 들었을 것이다. 예를 들어서, 바다의 상황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을 터인데, 조정에서는 바다의 상황과 전혀 관계없이 정치적인 목적으로 지시사항이 발생한다. 이순신 장군은 이러한 지시사항을 100% 수용하기 힘들었다.
정말 이순신도 그만두고 싶었을 것이다. 그의 부하들 중 한둘이 그랬던 것처럼 약간의 군량미를 들고, 무인도로 가고 싶었던지도 모른다. 그리고, 명에서 온 장군인 '진린'은 일종의 스카우트 제안을 한다. 전략적으로 뛰어난 지혜를 갖고 있는 이순신과 그의 리더십을 높게 샀을 것이다. (이내용은 소설에서 나온 내용일지 모르나, 지극히 이순신 중심에서 본다면 제법 그럴싸한 해석이라고 생각한다.)
존재의 이유가 무엇이었을까? 여러 가지 추측을 해본다. 혹한 바닷바람에 설익은 보리밥을 목 구녕을 넘기는 장면을 보면 재물은 아니었을 것이다. 그의 아들인 '이면'이 고향 아산에서 왜의 칼에 쓰러졌기 때문에 마음속에 생긴 복수심은 더더욱 아닐 것이다. 유일하게 생각해 볼 수 있는 단서는 쓰러져가는 조선을 막아내는 그의 책임감이었을 것이다. 이마저도 쉽게 포기하고, 더 쉬운 길을 찾을 수 있었을 것이다. 전쟁통에 부패한 관리들이 한둘이었겠는가?
어깨에 짓누르고 있는 책임은 경상도, 전라도 바다를 거쳐 삼도수군을 통제하는 상황에 이른다. 그 어려운 상황에 진정한 비저너리가 되어버린 것이다. 그의 부하들이 왜의 포로로 들어가 다시 조선에게 총구를 겨누게 된다. 그는 또 적을 부순다. 적이 있기 때문에 이순신이 있고, 이순신이 있기 때문에 적들은 계속 온다. 끊임없는 전쟁은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사망으로 종결짓고, 왜의 퇴로를 차단하는 노량 전에서 이순신은 전사하게 된다. 그의 죽음마저 처절하다.
우리뿐만 아니라, 세계사에서 그는 영웅으로 추앙된다. 진정한 영웅인 것이다. 그에게 다시 한번 박수를 보낸다. 그리고, 진심으로 수고하셨다고 큰절 인사를 드린다.
그의 가족은 행복했을까?
눈물이 난다.
이면과 많은 시절을 보내지 못했을 '아버지'로서의 이순신을 생각하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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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2015년 1월 정리한 글입니다.
칼의 노래는 4회 완독 한 글입니다.
소설이지만, 역사적 배경이 녹아 있습니다. 다 읽은 후, 씁쓸한 느낌을 지우기 힘들어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