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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수세미의 사랑

윤이창 작가님의 <나는 게으르고다>를 읽고

by 램즈이어

Dear Mr. 게으르고

네게 처음 관심을 갖은 건

순전히 너 이름 때문이었어

게오르규 집안인줄 알고

25시를 쓴 그 루마니아 작가 말이야

너의 외모 때문은 절대 아니야


올여름 세상에서 가장 훤칠하고

잘 생긴 수세미라고

찰칵찰칵 사진을 찍으며

길거리 스카웃 어쩌고 할 때

그들은 과연 너의 내면을 알까?

한 손에 술잔을

다른 손엔 국화를 들고 춤추는

너의 은밀한 모습을

환희와 슬픔

장음과 단음

불과 얼음이 함께 자리하는 네 마음을

그러다 동지애가 싹텄어


시간의 편린들을 유리병 속에 모아

방긋 어린이처럼 들여다보는 모습에


당당하게 게으른 시에스타로

뜨거운 태양의 기(氣)를 죽였을 때

어느 날 너의 감수성에 그만

반해 버리고 말았지

이게 사랑일까


가지가 가을볕에 조금씩 말라가는 것을

숲 속 우디향이 갈바람에 농밀해지는 것을

산새의 입김이 추위에 차가워지는 걸

너는 모두 알아채더구나

사랑에 빠지면 상대의

일거수일투족이 레이더에 잡히고

의미도 꿰뚫을 수 있대


엊그제 더위도 잊은 채 네가

붉은 담장을 어슬렁 기어오르기 시작할 때

난 마음이 쿵 했지

조금씩 위로 줄기와 마디를 뻗으며

속도를 내고

담장 끝에 도달하는 사이

내가 할 일은 더 바빠졌지


네 호흡이 가빠지고

몸을 던지고


놀라움에 감은 눈을 뜨면서

거미줄처럼 엉긴 실타래를 올려다 보더군

절망의 줄기 끊어버리는 걸 깜빡했다고?


아무것도 모르는 이 바보

인어공주에게 목숨을 빚진 왕자 같으네

나는 그 비련의 주인공처럼 되진 않을 거야

비밀 작전 수행한 세 녀석을 불러

넓은 잎사귀, 넝쿨손, 어린 노란 꽃

생생한 증언을 들어봐

자세히 세어보아


너를 지탱한

세상에서 가장 촘촘한

나의 사랑의 줄기

이미 삶아진 이웃집 Miss 수세미로부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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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 노트: 윤이창 작가님의 <나는 게으르고다> <그곳에 가려고>를 읽고 적어 본 댓글 시입니다. 대부분의 단어들을 작가님의 글에서 빌렸습니다.



대문 사진: 류주영 <untitled> acrylic on canvas, 130x97cm, 2023 서울 키아프 전시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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