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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램즈이어 Dec 06. 2023

처음 해보는 일

생애 처음이자 마지막 김장

 맛이 있을까 하는 설렘과 드디어 해냈다는 뿌듯함으로 잠자리에 들었다. 몸은 천근만근인데, 베인 새끼손가락에서 아싸 하게 아픈 기운이 올라온다. 싸하게 그리움도 밀려오며 내가 끙끙 앓는 것인지, 김장 날 앓으시던 어머니의 숨소리가 생각나는 것인지 헷갈린다. 생애 처음으로 김장을 했던 날 밤이다.

 요즈음 직장 여성이 김치 못 담그는 것은 별 흉이 되지 않는 듯싶다. 나처럼 담글 줄 모르는 사람이 있고, 담글 줄 알지만 안 담그는 사람도 많다. 왜 담그지 못하는가에 대해 나는 좋은 구실도 갖고 있었다.

 결혼 후 첫 김장 하던 날, 도울 준비를 하고 시어머니 옆에 섰을 때 어머니는 뜻밖에 한마디 하셨다.

“가서 너 할 일 하렴. 안 도와도 된다.”

“예? 저도 배워야지요?”

“너는 배우지 말거라!”

 직장에 더 신경 쓰라는 뜻인지, 한집에 살면서 각자 자신의 영역에만 몰두하자는 뜻인지 잘 몰랐지만, 사랑과 배려가 담긴 명령 같아서 곧장 순종했다.

 어머니는 처음엔 혼자서, 나중엔 도우미 아주머니와 함께 김치를 담갔고, 세상을 떠나기 이삼 년 전까지 김장을 하셨다. 어머니 소천 후 나는 김치 담글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다. 식구는 단출하고 밖에서 식사하는 날이 많으니. 여기저기에서 얻거나 사서 먹었다. 평생 김치는 담그지 않을 생각이었다.

 발단은 친지분의 선물에 있었다. 주말 농장을 부러워한 적이 있는데, 11월 어느 날 덥석 손수 경작한 배추 두 포기, 무 두 다발, 실파 한단을 안겨 주었다. 속은 차지 않고 푸른 잎이 쫙 벌어진 배추와 흙이 잔뜩 묻은 무는 여느 때처럼 나랑은 아무 인연이 없어 보였다. 부지런히 입양시킬 가족을 물색했다.

‘가만있자 언니 네는 지난 주말 김장했고….’

 아는 이 모두 김장을 끝낸 상태고, 배추가 비싸지 않을 때라 마땅히 돼 안겨줄 사람이 생각나지 않았다. 시시각각 시드는 것 같은 녀석들을 바라보며 아득한 마음에 한숨이 나왔다. 밤새 고민하고 나니 새벽에 한 가지 해결책이 떠올랐다.

‘유튜브에 뭐든 있다니까. 까짓 내가 담그지 뭐.’

 가장 단순한 방법으로 영상을 따라서 해보니 생각보다 어렵지 않고, 유기농 배추여서 아삭아삭 김치 맛이 좋았다. 두 포기를 담그고 돼지고기를 삶아 보쌈까지 해 먹으며, 신이 난 나는 그만 오버하고 말았다. 태백 고랭지 절임 배추를 10 킬로 주문해 버린 것이다. 내친김에 한번 김장도하고 싶어서였다.

 디데이 하루 전 다섯 포기가 도착했다. 태백에서는 파릇했을 젊음이 힘이 빠져, 널브러져 있는 것이 마치 갱년기 이후의 내 모습 같았다. 기왕이면 고향 맛을 내고 싶어서 유튜브에서 안내한 대로 전라도식 젓갈을 준비했다.

 알고 보니 조연들의 세계가 더욱 다채로웠다. 무채는 강의대로 충분히 확보해야 한다. 말단 병정으로 구석구석 침투해서 육탄전을 치르니까. 홍 갓은 장옷 차려입은 향긋한 미인! 싸움보다는 위로 공연에 어울리겠지? 미나리는 아리송한 이중 스파이, 미심쩍으니 조금만 넣자. 둥근 머리채의 가녀린 쪽파들, 행주산성에서 돌을 나르던 아낙네 모습 같다. 특수 전(戰)을 위해 몸 불리는 청각! 어렸을 때 미워했던 파랑 지렁이가 아닌가?

 북 새우젓은 붉은 새우들이 작은 어항에서 유영하는 듯 통에 담겨 있고, 까나리 액 젓은 카나리아 새가 아니라 어느 은빛 물고기에서 탄생했다나? 멸치 진젓까지 가세해서 오묘한 화학작용을 지휘할 터이니, 이들이 연출가인 셈이었다.

 갈치속젓이 담긴 병마개를 열었을 때였다. 온 집안에 비릿한 냄새가 퍼지면서 삼십여 년 동안 까마득히 잊었던 무엇인가가 되살아났다. 어린 시절 김장 때에 오랫동안 집안에 머물렀던, 친정어머니 체취 같기도 한 남도의 냄새! 그 향기에 실려 시간여행을 한 듯 생생히 어떤 장소에 이르렀다. 유년시절 광주 북동 집 안마당, 배추들이 내 키보다 높이 쌓여있고, 바삐 오가며 호령하는 어머니가 보인다. 하얗게 씻긴 무와 채소 더미들 사이에서 네 자매가 쪼그리고 앉아 파 마늘을 다듬고, 종국엔 펑펑 눈물 흘리며 퇴장하다 메운 눈으로 어머니께 묻는다.

“김치 담그는 날 웬 풀을 쑤세요?”  

 그때의 어머니보다 더 나이가 들어서 처음으로 찹쌀 풀을 쑤고, 고춧가루와 마늘, 각양 조연들을 섞어 넣었다. 드디어 흡족한 김장 냄새가 났는데 그때 아무래도 무채가 좀 부족해 보였다.

 다음 순간 조급하게 무를 썰다가 그만 칼이 새끼손가락을 스치고, 피가 송송 치솟았다. 거즈 수건으로 감당이 안 되어 가까이 사는 후배에게 SOS를 청했다. 붕대와 밴드를 준비해서 달려온 후배는 부엌 주변을 보고 눈이 동그래졌다.

“이렇게나 사방에 피가 튀겼어요?”

“아니, 벽에 뭍은 것은 고추 반죽.”

 일이 서툴러 사방에 묻혀놓은 점점의 버무림이 어쩜 그리 핏빛과 똑같은지, 이렇게 벌여놓고 김장하는 모습을 친정어머니가 안 보셨기에 망정이었다. 잔소리 한 사발 감이라.

 속 반죽이 불고 있어 예리한 통증에도 오도 가도 못하고 진도를 나가야 했다. 아픈 손가락으로 울면서 혼자 배추를 버무렸다. 배추 한 잎에 속 넣고 돌돌 말아 테스트용으로 한입 먹여 볼 사람, 버무리며 함께 수다 떨 사람이 없었다. 처음 김장하는 일이 쑥스러워 아무도 부르지 않았더니만.

 축 쳐져있던 아줌마 배추가 사라지고, 주황색의 온갖 보석으로 치장한 왕비님이 등장했다. 화려함에 눈이 팔려 아픔이 싹 가시며, 귀하신 옥체를 조심조심 모셨다.

 누가 보면 소꿉장난 같은 다섯 포기 김장이지만 진짜 주부가 된 듯 여간 기쁘지 않았다. 그동안 김장 날, 두 분 어머니의 진한 수고를 제대로 알지 못했음도 깨달았다.  

 퇴근해서 나의 맛이 간 얼굴, 칭칭 감긴 손가락을 본 남편의 반응은 예상 답안지였다. 내가 얼마나 스스로 대견했는지는 상상을 못 하는 것 같았다.

“내년부터는 김장하지 마! 사서 먹자.”

“……”

 하고 싶은 말이 많으니 오히려 아무런 대꾸가 안 나왔다. 김치 옆에서 인증 숏 찍어 SNS에 올리려던 참인데? 이제 겨우 김장 원년이 시작되었는데, 처음이자 마지막 김장이 되라고? 냉동 칸에 남은 희귀 젓갈은 다 어떡하고?

 위로는 다음날 아침 엉뚱한 곳에서 찾아왔다. 출근길 모닝커피를 사는 카페에서 붕대 감긴 새끼손가락 안부를 묻는 여주인에게 설명 겸 자연스레 자랑을 하게 됐다.

“생애 첫 김장하다 벴어요.”

“아고, 아프셨겠네요! 그런데 세상에서 제일 맛난 김치가 뭔지 아세요?”

“글쎄, 뭔데요?”

“자신이 담근 김치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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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년 전 했던 김장입니다.

대문의 그림 사진: SZINYEI MERSE Pál <양귀비 꽃밭 Poppy Field> 1896 헝가리 국립미술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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