놀라운 봄 손님
픽션으로 쓴 서평, 『일상으로의 초대전』을 읽고
버들가지 아래서 개나리, 박태기꽃과 수다를 떨고, 집에 돌아와 보니 봄 손님이 도착해 있었다. 단정한 차림새로 부드럽게, 먼저 도착해 죄송하다며 인사를 한다. 미안한 건 내쪽이었는데. 그는 미술교사라고 자신을 소개했다. 중학교 학생들이 미술을 좋아하게 끔 노력하고 있다며.
분쇄기에서 원두를 갈아 여과지를 살짝 적셔 드립 커피를 내렸다. 수줍은 향기가 방을 한번 구경하고 나오니 손님의 얼굴에서도 미소가 번진다.
삶이란 어찌 늘 그리 특별하기만 하던가요. 고단했던 하루에 또 다른 하루를 덧씌워 슬픔과 기쁨의 평균값을 맞춰가는 일이 살아가는 일 아닌가요?
그가 운을 떼며 시작한 말들은 갓 내린 커피 향만큼이나 새롭고 푸근했다. 나도 모르게 내 최대 고민, 글쓰기 이야기가 나와 버렸다. 손님은 별 관련도 없는 프랜차이즈 김밥 집 폐업 해프닝으로 응수했다. 처음엔 왜 김밥 이야기를 하나 했다.
역시 또 다른 대박 신화를 좇아 글쓰기 프랜차이즈 집을 내고 싶었던 것은 아닐까?
내 숨은 열망을 족집게 처럼 표현해서 뜨끔했다. 그는 모니터를 거울삼아 스스로를 진찰하려 글을 이어가고 있다면서 이상과 마이클 잭슨의 거울을 소개해 주었다.
나는거울속의나를근심하고진찰할수없으니퍽섭섭하오.
나는 거울 안의 이 남자로부터 시작하려 해 ~
아, 나도 거울에 대해 더 생각을 해 봐야 한다.
그는 류이치 사카모토를 좋아했다.
샤를로트 문드리크가 지은『무릎딱지』동화도 소개해 주었다. 아이에게 상실을 어떻게 대면해야 하는지 가르쳐 주는 일이 제일 어려운데. 엄마를 잃고 화가 난 아이의 이야기라고 한다. 그 책의 첫 문장은 까뮈의『이방인』을 닮았다.
오늘 아침 엄마가 죽었다. 사실은 어젯밤이다.
상대성 이론에 관심이 많은 내게 그는 에셔의 <상대성> 도 알려 주었다. 그림 속의 뫼비우스 띠 같은 계단도 인상 깊었지만 손님이 그린 자신의 아파트 계단이 더 감동이었다. 17층까지 몇 번이고 오르내린다는 그의 땀이 서린 계단이다. 달리기에 고전을 면치 못하는 내게 헛둘헛둘 빨간 단풍잎 길을 달리는 토끼의 모습도 얼마나 부러웠던지.
시간이 흐르니 드디어 자신에 대한 이야기가 나왔다. '안빈낙도를 모르는 속물들아!' 하며 조각 작업실에 틀어박혀 살던 시절이 있었다. 늙은 사춘기부터 예감했던 인생의 연체는 뭐든 늦었던 대가로 선택의 구간구간에서 값비싼 연체료를 지불하게 만들었다고.
'연체료를 지불한 대신 더 귀중한 무엇을 얻었을 거예요.' 이렇게 말해주고 싶었다. 그가 그린 자화상 <누구네집 누렁이>와 아내의 모습 <건자두>를 보았다. 피곤한 모습이지만 목이 긴 여인은 모딜리아니의 모델보다도 더 매력적이었다.
가정생활 이야기도 들려주었다. 결혼 안 한다, 집 안 산다, 결코 아이는 안 낳는다고 주장하던 이가 세 번이나 결심을 뒤집어서 베드로처럼 되었다고 한다. 둘째의 돌잔치에서 '저에게도 이런 날이 오네요. 아이들 잘 키우겠습니다'라는 인사를 했다며 멋쩍게 웃었다.
아이들이 등장하니 속사포처럼 이야기가 쏟아졌다. 짱뚱어처럼 온 집안을 갯벌 삼아 퍼덕퍼덕 기어 다니는 둘째는 뭐든지 입으로 들어간다. <무엇에 쓰는 물건인고> 하며. 모서리가 잘 다듬어지고 적당한 무게에 탐스러운 색상까지 더해진 나무 블록은 조각가에게도 거절할 수 없는 유혹이 되었다.
"나도 한번 먹어보자. 나도 다시 한번 새롭게 느껴보자." 그가 혀로 금단의 열매를 맛보았을 때.
찰싹! 매섭게 날아온 아내의 등짝 스매싱!
"감히 아이 것을~"
매 맞은 사연은 안 됐지만 손님의 아이 목욕송 <간지럼 괴물>과 피터 팬 이야기를 듣자, 그만 나도 마음이 붕 떠 버렸다. 하늘을 날아 달나라를 거쳐 네버랜드 까지 다다를 수 있을 것 같았다. 피터가 날 수 있는 두 가지 필요충분조건, 첫째 팅커벨의 마법가루, 둘째 행복한 기억을 떠올리는 것을 그가 열심히 설명하자마자.
보일 듯 보이지 않는 꽃다지처럼 잔잔하게 대화를 이어갔을 뿐이다. 그런데 그가 떠난 후 알 수 없는 평온함과 위로, 기쁨이 찾아왔다. 내가 오랫동안 기다렸던 사람을 만난 것 같은.
언젠가 읽었던 어떤 단편이 생각났다. 형색이 초라한 손님을 맞이했었는데 알고 보니 예수님을 접대한 것이었다. 문득 그의 정체성이 환하게 다가왔다.
표면적인 직업이 미술교사였을 뿐이다. 흔한 이웃인체 했지만 그는 내가 그토록 만나고 싶었던 진정한 철학자, 예술가이지 않았을까? 깊이 있고 감동적이면서도 장난기를 담뿍 간직한…. 그가 담임을 맡은 징글징글한 남중생(男中生)들이 살짝 흘리기를, 손님은 아이들 배꼽정도는 (어른은 물론) 인정사정없이 빼버릴 수 있는 사람이었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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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장광현 작가님의 미다스북스 출판 『일상으로의 초대전』 을 읽고 쓴 독후감입니다. 픽션이 가미되었고 굵은 글자체는 책 속의 문장을 따온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