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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램즈이어 Apr 23. 2023

가재가 노래하는 곳을 찾아

정원 있는 집

 내 꿈은 정원 있는 집에서 살아보는 것이다. 실현될 성싶지 않으니 그 로망이 점점 커진다. 강화도에 농막이나 전원주택을 지은 지인을 쫓아다니며 마치 곧 따라 할 것처럼 집 짓는 과정에 귀 기울인다. 제주도 친구의 야생화 가득한 뜰은 사진에서만 보아도 가슴이 미어진다. 브런치 마을에서도 자연스레 강원도 예쁜 정원의 그림일지를 가장 좋아하게 되었다.

 약 이 삽 십 년 전에는 집 근처 야산 기슭에 법무단지라고 불리는 주택단지가 있었다. 빌라에서 신혼살림을 할 때 나중에 경제적으로 여유가 생기면 그곳에서 살리라 생각했다. 길 가다가 나무가 많은 집이 있으면 담을 넘보며 언젠가 언젠가 하며 꿈을 키워갔다. 그런데 점점 서울의 집값, 땅값이 터무니없이 오르더니 조그만 정원이라도 있는 주택은 점점 자취를 감추었다. 모두 다세대 주택, 빌라로 변신한 것이다.

 대안으로 마음을 끄는 곳을 알게 되었는데, 1층 사는 사람에게 정원 가꿀 수 있는 권리를 주는 아파트 단지이다.

 지난가을 연휴 내내 아파트 1층, 남의 집을 기웃거렸다. 전세 계약 기간 만료가 다가오므로 혹시나 하고 네이버 부동산을 검색하니 일층 전세 매물이 두건이나 나와 있었다. 보통 때는 잘 없는 귀한 물건이다. 휴무일이라 정식 문의는 못하고 그 아파트 동 주변을 서성이며 주변을 탐색했다.

 내가 금방이라도 결정을 할 기세니 현실감을 가지라며 식구들이 한마디 씩 조언을 한다.

“그렇지 않아도 볕이 잘 안 드는데 밖에서 보일까 봐 많이 가리고 살아야 돼. 습기도 많아.”

“위에서 오만가지 물건이 떨어진데. 학용품이니 이불이니.”

“놀이터에서 축구하다 공이 날라들면 아이들이 막 쳐들어온데.”

 이 모든 부정적인 이야기도 내 마음을 막지는 못했다.

 ‘도심에서 10평 정도의 정원을 소유한다는 것은 대단한 일이야!’

 내가 멈칫한 것은 다른 이유 때문이었다. 연휴가 길어서 부동산에 연락은 못하고 하루하루  답사를 해보니 눈에 띄는 것이 있었다. 거실을 제외한 모든 창문에 쇠창살이 있는 것이다! 방범(防犯)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으므로 방방마다 설치해야 하나보다. 그러니 각 방에서 밖을 내다볼 때 조각난 풍경밖에 볼 수 없을 텐데…. 도심에서 정원을 소유하는 것은 이렇게 눈물 나는 값을 치르고 서야 가능하다니!

  (간혹 아무런 창살을 설치하지 않은 용감한 집도 보이긴 했다.)

 나는 내가 왜 이러는지 잘 알지 못했다. 남편 말마따나 전원에의 꿈이 과도한 사람인가 했다.(일은 잘 못하면서) 그런데 연휴기간 독서모임 숙제인 델리아 오언스의『가재가 노래하는 곳』을 읽고서 내 마음이 자연스럽다는 것을 알았다.     


“저기 어디 가재들이 노래하는 곳에 가서 꼭꼭 숨어야겠네.”

“무슨 말이야, 가재가 노래하는 곳이라니? 엄마도 그런 말을 했었어.”

엄마는 언제나 습지를 탐험해 보라고 독려하며 말했다. 갈 수 있는 한 멀리까지 가보라고. 저 멀리 가재가 노래하는 곳까지.

“그냥 저 숲 속 깊은 곳, 야생동물이 야생동물답게 살고 있는 곳을 말하는 거야.” (P 1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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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이 내리자 테이트는 다시 판잣집으로 돌아갔다. 하지만 호소에 다다랐을 때는 높은 캐노피 밑에서 발길을 멈추고 습지의 어두운 비원(秘苑)으로 손짓해 부르는 수백 마리의 반딧불을 바라보았다. 저 멀리 깊은 곳, 가재가 노래하는 곳으로. (p455)     


 이 책은 야생의 환경에서 자란 주인공 카야의 성장과 사랑과 외로움을 담았지만 진정한 또 다른 주인공은 ‘습지’라고 했다. 그 습지의 품에서 벌어지는 인간과 생물들의 약육강식(弱肉强食) 이야기를 펼치면서 그들이 향하는 곳 - ‘가재가 노래하는 곳’- 을 제목으로 삼았다.

 야생의 생물이 자신의 본래 장소인 ‘가재가 노래하는 곳’을 향한다면 사람에게 ‘가재가 노래하는 곳’은 어디일까?     


너는 흙이니 흙으로 돌아갈 것이니라. (창세기 3:19 부분)   


 그건 다름 아닌 흙이 아닐까? 사람은 흙으로 돌아가는 존재라 땅을 그리워하게끔 지어지지 않았는지? 빗소리, 흙냄새를 만날 때 본향의 소리, 향취인양 이상한 그리움과 행복감이 느껴진다. 천상병 시인(詩人)도 어디선가 이런 이야기를 한 것 같다. 정원 있는 집을 소유하고픈 나의 몸부림도 ‘가재가 노래하는 곳’을 찾아가고픈 일종의 몸짓이 아닐지.

 마음 편하게 땅 집에 대한 로망을 가지고 있어야겠다.

그런데 여러 가지 형편상 도심을 떠날 수 없으니 결국 죽음에 이르러서나 실현되는 꿈이려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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