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돈키호테 I』을 읽고
저렇게 두꺼운『돈키호테』를 왜 읽어? 『돈키호테』가 왜 그리 유명한지 이해 못 했고, 내 취향이 아니라고 생각해서 제대로 한번 읽어 보지도 않았다. 이번에 비로소 그간 편견을 가진 이유를 알았다. 어려서 요약본으로 힐끗 읽은 내용은 주로 골격에 해당하는 이야기였는데, 내가 몰랐던 문학적 깊이와 향기를 드러내는 속살이 있었다.
즉 날실과 씨실처럼 두 가지 흐름 속에, 날실은 슬픈 몰골의 기사님(돈키호테의 별명)과 산초가 모험 중에 만나는 사람들의 줄거리고 씨실은 주변 사람들의 이야기를 통해 풀어가는 로맨틱 단편들이다.
# 씨실: 로맨틱 단편들에서 만난 놀라운 캐릭터
** 여자 목동 마르셀라 이야기
결혼에는 마음이 없고 씩씩하게 자기 길을 가려고 하는 요즘 젊은 여성들과 흡사하다. 예사롭지 않은 부유함과 아름다움, 성품을 소유했으나 혼자서 양을 치며 목동으로 살기를 선택한다. 그것도 울창한 숲이 있는 산중에서. 마르셀라를 향한 짝사랑에 스스로 목숨을 잃은 청년 때문에 모든 사람들이 그녀를 비난하는 와중에 그의 장례식에 용감하게 나타난다. 당당히 방어하는 스피치를 하려고! 요즈음 상황이라면 톱 영화배우 겸 모델 정도의 여성이 변호사와 작가의 언변으로 왕따의 상황에서 뭇 남성들에 맞서서 연설한 것이다. 17세기에 이런 캐릭터와 장면을 등장시킨 신선함!
저는 자유롭게 태어났고 자유롭고 살고자 들과 산의 고독을 선택했습니다. 그리소스토모를 죽인 것은 그의 초조함과 무모한 욕망이었거늘, 어찌하여 저의 정결한 행동과 신중함을 죄라고 하시는 겁니까? 저는 나무들을 벗 삼아 순결을 지키려 하는데, 남자들에게서 순결을 지키기를 요구하면서 또 그것을 잃도록 하는 건 도대체 무엇 때문입니까? (p194~196)
** 두 쌍의 러브 스토리 - 산속 미치광이 카르데니오 와 미코미코나 공주
카르데니오는 예측했듯이 사실 잘 자란 귀한 집 장남이었다. 가까운 벗이라 여겼던 페르난도의 배신으로 보배처럼 키워서 갓 결실을 앞둔 첫사랑을 잃게 되자 산속 깊은 곳으로 도피한 사연이다. 회한과 분노에 휩싸여 분열하는 자아, 숲 생활을 하며 양치기들과 부대낄 때의 반응을 마치 정신과 의사처럼 생생히 묘사했다. 큰 충격과 스트레스로 인한 이중인격, 분노 조절 장애, 적응 장애 환자의 모습으로.
카르데니오의 로맨스가 끝나지 않았고 그가 미칠 이유가 없었다는 반전이 후반에 등장한다. 산속 개울가에서 마주친 남장(男裝) 여인은 사기꾼 페르난도가 과거에 사기 결혼했던 장본인이었다. 그녀도 기사소설을 꿰뚫고 있어서 돈키호테를 산에서 끌어내기 위한 미코미코나 공주 역을 맡는다. 객줏집에서 두 커플이 뜻밖의 해후를 하며 사랑을 되찾고 대단원의 막을 내린다. 두 쌍의 결혼식이 곧 열릴 것 같은 뉘앙스다. 이 로맨틱 커플에서 두 여주인공 루스신다와 도로테아는 일편단심 정절을 지켰던 성춘향 등 이조시대 우리 여인네 모습과도 닮았다.
문제는 마르셀라부터, 무어 여인 소라이다, 산양치기들이 연모하여 산속에서 메아리쳐지는 이름 레안드라 까지 모든 여 주인공들이 완벽하여 비현실적인 느낌이 든다는 것이다. 페르난도가 성격상 끝까지 난봉꾼일 텐데 나중에 좋은 사람으로 변하여 돈키호테의 우군 역할을 하는 것도 좀 이상하다.
# 날실 : 마법의 성과 슬픈 몰골의 기사님
돈키호테가 흠모하는 둘시네아 델 토보소는 어떤 여인일까? 산초가 알고 있는 마을의 평범한 농부 로렌소 코르추엘로의 딸이다. 힘센 젊은이만큼이나 몽둥이를 잘 던지고 근엄하고 가슴에 털까지 났다고 한다. 뒷부분에는 뚱뚱하다는 표현도 있다. 요즈음 우리 용어로 완전 톰보이 다. 목소리는 쩌렁쩌렁, 예쁜척하는 애교는 전혀 없고 아무 하고나 장난치고 그렇지만 입담 좋고 예의 바르다. (이 또한 현대적이며 실감 나는 캐릭터다)
사랑하는 여인을 ‘전 우주의 여왕으로 마땅하신 분’이라며 끝까지 충성하고 흠모하는 모습에서 ‘기사도’라는 어휘의 의미를 절절히 깨닫는다. 부러운 둘시네아! 서구에서는 영국 신사의 전통에서, 서부극의 Lady First에서 그 흔적이나마 감지할 수 있는데. 한국 중년 남성의 현주소는?
“당신을 위해 저놈을 무찔렀소!”
2022년 7월 열대야가 기승을 부리던 새벽, 우리 집 안방에서도 이런 외침이 있기는 했다. 초저녁부터 윙윙대는 모기 한 마리 쫓아내 달라는 부탁을 밤새 못 들은 척하더니, 우연히 새벽 화장실 가는 길에 그놈을 잡게 되자 대단한 기사도를 발휘한 듯 의기양양했다. 창(槍)도 아니고 손바닥과 신문지 한 장으로 휘갈기고서는.
나의 사랑과 그분의 사랑은 늘 정신적인 것이라 그저 순수하게 바라보는 것 이상은 해본 게 없네. 그분을 사랑한 지 12년이 되지만 그분을 바라본 것은 진실로 맹세컨대 불과 네 번밖에 되지 않는다네. 더군다나 이 네 번 중에서 내가 그분을 보고 있다는 것을 그분이 안 것은 아마도 한 번밖에 안 될 걸세. (돈키호테)
대학교 때 짝사랑 전공이었던 내게 이 고백은 무척 낯익어서 돈키호테 기사님과 동질감을 느꼈고, 다독(多讀) 가로서 그 많은 것을 기억하고 척척 인용하는 모습도 존경스러웠다. 학문과 군사에 대한 돈키호테의 연설에서 포로와 노예 생활을 5년이나 했던 세르반테스의 군인 생활과 인문학, 양쪽의 철학이 엿보인다.
객줏집에서 담요로 헹가래 쳐지는 산초나 윗옷만 걸친 채 공중제비 넘고 물구나무서는 기사님 모습은 개그 콘서트 방송작가께 영감을 주지 않았을까? 개콘을 넘어서는 높은 수준의 유머와 해학이 끝까지 펼쳐지지만.
그게 내 일의 절묘한 점이네. 편력기사가 이유가 있어서 미친다면 감사할 일이 뭐가 있겠나. 핵심은 아무런 이유도 없는데 미치는 데 있는 것이야. (돈키호테)
전반부는 시에나 모레나 산중이, 후반부는 객줏집이 중요한 무대가 되었다. 우리나라 사극에서도 주막이 스토리 전개에 중요한 역할을 했던 거 같다. 객줏집이 기사님의 무훈을 빛내는 마법의 성으로, 아라비안나이트의 천일 야화처럼 무궁무진한 이야기가 펼쳐지는 장소로 멋지게 사용되었다.
무식하면 용감하다고 이 훌륭한 책을 지루할 것이라고 섣불리 단정하다니. 죄송해요, 슬픈 몰골의 기사님.
* 『돈키호테 I』안영옥 옮김 열린책들 출판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