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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국모국경 Dec 20. 2022

훔친 문장

"취미가 뭐예요?"

요새는 뜸하지만, 한 때는 새로운 사람들을 만나면 취미가 뭔지, 특기가 뭔지 묻는 것이

영어를 처음 말할 때 '하와유' '파인땡큐 앤드 유' 만큼이나 자연스럽게 나오는 말문 트는 문장이었다.


발령이 있고 첫 회식 때였다.

대체로 "남편은 뭐해요?"라는 질문에서 시작하는데 과장님은 나에 대한 배경 정보를 사전에 입수했는지 "남편은 뭐해요?"라는 질문 대신 예스러운 사람처럼 '취미가 뭐예요'를 물어왔다.


특기도 없는 주제에 취미라도 괜찮을 걸 지니고 싶은데 내세울 취미조차 없다.

평소 '경찰을 사랑한다. 경찰을 좋아한다.'라는 뻔뻔한 말을 동료들 앞에서 서슴지 않고 잘 떠들어댄지라, 오래전 서울경찰청장을 지내신 김석기 청장님의 말을 따라 '저는 취미가 없습니다. 굳이 저에게 취미를 묻는다면 전 경찰을 사랑하는 게 나의 취미입니다.'라고 근사하게 말하고도 싶었지만

요새 들어 부쩍이나 나 자신에게 '착각'은 아닐까 하고 검토해 보는 말이 '경찰을 사랑한다', '경찰을 좋아한다.'는 말인지라 양심 없이 내뱉을 순 없었다. 그렇다고 당장 그 자리에서 없던 취미를 생성시키는 것도 아닌 것 같아 "도둑질요" 하고 대답했다.


임기응변치 고는 경찰관답기까지 한 썩 괜찮은 답이라 생각했다.

이유는 첫 만남에서 중요한 건 서로 간 대화를 이어갈 수 있게 하는 말 주변인데 나의 대답은 새로운 궁금증을 자아내고 새로운 질문으로 적어도 내 몫으로 주어진 대화의 시간은 때울 수 있었으니 말이다. 당연히 반문이 들어왔다.

"도둑질요?"

"네, 책 속 좋은 문장을 훔치는 일이 취미라면 취미예요"

다행히 그 자리에 증거물도 있었다. 나는 책을 읽으면 좋은 문장을 다시 필기하는 버릇이 있다. 그리고 그 필기 수첩은 언제든 반복해 읽을 수 있고, 언제든 새로이 남길 수 있게 항상 지니고 다닌다. 나의 취미를 증명할 수첩까지 내보이곤 나에게 할당된 시간을 신속히 매듭지었다. 나에게나 재미있는 문장이고, 의미 있는 문장이고, 다시 보고 싶은 문장이지, 남들에겐 그다지 관심이 없는 짓임을 모르지 않기 때문이다.



그리고 자백하건대,  실은 나는 문장을 훔치는 나쁜 손버릇으로 끝나지 않는다.

훔친 문장을 다시 내 것인 양 나만의 문장으로 흉내내기도 잘한다.

일종의 훔친 것을 세탁하여 완전범죄 실현시킨 것처럼 말이다.

보고서를 잘 쓴다고 평가받았다면, 그 또한 훔친 문장을 내 것처럼 잘 쓴 이유이다.

게다가 문장을 훔치다 보면 그분의 인생관마저 훔치고 싶은 대도의 욕심까지 더해진다.


오늘 훔친 문장, 훔친 인생관이다.

치열하게 사는 이보다는 그날그날의 행복감을 놓치지 않도록 여유를 가지고 사는 사람이 더 부럽고

남들이 미덕으로 치는 일 욕심도 지나치면 오히려 돈 욕심보다 더 딱하게 보이는 법이다.

내가 쓴 글들은 내가 살아온 시대의 거울인 동시에 나를 비춰볼 수 있는 거울이다.


거울이 있어서 나를 가다듬을 수 있으니 다행스럽고,

글을 쓸 수 있는 한 지루하지 않게 살 수 있다는 게 감사할 뿐이다.


 12월,  12월은 매서운 바람 속 성찰의 거울 앞에 나를 세우고 바라보기엔 썩 괜찮은 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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