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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국모국경 Feb 13. 2023

책상에서의 지적이 현장의 손발을 체포한다.

[아동학대 의심 신고에 주로 기대는 현재의 사후 대응 방식에서 벗어나 아동. 건강. 발육부터 부모 양육 태도까지 두루 살펴보는 선제적인 예방 대책이 필요하다는 지적이 나온다]  


2023. 2. 13. 오늘 아침 기사다.

최근 연이어 일어난 아동학대사건을 다뤘다.  

선제적인 예방 대책이 필요하다는 건 누구나 안다.

굳이 전문가나 다른 누군가가 지적하지 않아도. 누구나 아는 사실이다.

그런데 현장 경찰관인 나로서는 이 문장에서 빈칸이 보인다.

'두루 살펴보는'{                } 선제적인 예방 대책'이 둘 사이 틈이 느껴진다.   

이 빈칸에 들어갈 말이 무엇인지... 모르겠다.

필요하다는 단순한 지적보다 빈칸에 현장의 답을 기재해 주었다면 이 기사는 나에게 더욱 유용했을 것이다.




과연 어떤 대책이... 한 가정 속에 있는 한 아이의 건강상태, 발육상태, 나아가 부모 양육 태도.

'태도'까지 두루 살펴보는 선제적 대책일까???

왜? 나는. 아동학대를 방지하고 그 범죄를 처벌해야 하는 임무를 부여받은 나는,  

왜? 그 대책을 찾지 못하고 이렇게 분노하고 방황하는 것일까?

사후약방문이라 하지만 이건 사후만의 문제도 아닐뿐더러 설령 사후라 해도 외양간은 고쳐져야 한다. 

그러기 위해 필요한 건, 국민들을 함께 공분의 속으로 빠져들게 하는 말이 아니라, 국민과 함께 고민하는 말,  그 대책의 말이 필요하다. 그런데 정말이지 어떻게 해야 하는 것인지 모르겠다. 

내가 지금껏 찾은 답이라곤 고작 '함께'였다.  혼자 할 수가 없어서...




[부모. 가정 내 가해가 대부분인데 시설등 보호조치는 제대로 안돼] 

[온몸 멍 사망 초등생 부모구속 장기결석에도 학교서 파악 못해]  


"고통받고 있는 사람들에게 연민을 느끼는 한, 우리는 우리 자신이 그런 고통을 가져온 원인에 연루되어 있지는 않다고 느끼는 것이다. 우리가 보여주는 연민은 우리의 무능력함뿐만 아니라 우리의 무고함도 증명해 주는 셈이다. 따라서 연민은 어느 정도 뻔뻔한 반응일지도 모른다." - 수전 손택

연민의 마음조차 그 속에는 자신의 무고함을 이야기하려 하는데 

지적은 나는 그들과 다른 사람임을,  잘못이 없는 사람임을, 증명하려 하는 애씀은 아닐까? 누군가를 비난하는 지적의 글보다 더 쉬운 글은 없다고 한다. 우리는 정말 다른 누군가를 비난할만큼 아무런 책임이 없는 것일까? 처벌 규정이 없다고 해서 우리는 아무 죄도 없는 것일까?

아동복지법 제5호 제3항 모든 국민은 아동의 권익과 안전을 존중하여야 하며, 아동을 건강하게 양육하여야 한다.라고 규정하고 있다. 물론 제5조는 보호자 등의 책무이다. 하지만 이때 모든 국민이, 법적보호자로서 오로지 내 자식만 내가 알아서 건강하게 잘 양육해야 하는 의무로 국한해서 규정한 것일까?

작년 넷플릭스 드리마 '소년심판'의 한 대사 "한 아이를 키우려면 온 마을이 필요하다는 말은 온 마을이 무심하면 한 아이를 망칠 수 있단 뜻도 된다"라는 말이 스친다. 우리는  '모든 국민이 ~ 하여야 한다'라고 규정한 의무를 다하고 사는 것일까?




[학대 피해아동 85% '다시 집으로'.... 재학대 15%] 


학대 피해아동들이 왜 다시 집으로 돌아가는 것일까? 

아이들을 보호하는 수많은 복지정책이나 시스템이 갖추어져 있고 그 속에서 아이들은 안전하게 생활도 하고 교육도 받을 수 있는데 왜 자신을 학대한 부모에게로 돌아가는 것일까?

상상해 봤다.

내가 학대받은 아이라면... 왜 다시 학대의 집으로 돌아갔을지

내가 가정폭력 당한 여성이라면... 왜 다시 폭력의 가정으로 돌아갔을지. 상상해 봤다.

상상 속에 나는,  죽을 만큼의 폭력이 아니라면 남들이 눈치채지 않게 견디어 내면서 나도 남들처럼 평범한 삶을 사는 척, 평범 속에 끼여 평범하게 살고 싶어 했다.

아무리 가정의 회초리가 아프고 무섭다 해도 '부모로부터 학대받는 아이', '남편으로부터 폭력 당한 여자'로 취급되고 분류되어, 사회의 차가운 연민의 '눈초리' 보단 부모나 남편의 '회초리'가 덜 아프고 덜 고통스러웠다. 그래서 나는 더는 신고하지 않았고, 그래서 나는 원래의 자리로 되돌아갔다. 

상상 속에 나는 폭력에 길들여진 무력함과 동시에 사회의 매서운 시선과 편견에 길들여져 다시는 112를 누르지 않았다.






반복이다.

사건이 일어나고,  급속히 기사화되고, 분노한 여론이 끓어오르고, 그러면 죽은 사람을 당장이라도 살릴 것 같은 응급 대책이 나왔다. 

그리고 '모든 것은 현장에 답이 있다.'라는 명제 역시 변하지 않는 정답으로 반복 처리되어 언제나 결론은 현장에 문제가 있었고 현장이 매뉴얼대로 했었야 했기에 현장에 대한 감독을 강화하고 추가된 지침과 매뉴얼들을 쏟아붓는다.

현장은(현장에서 일하는 사람들을 말함) 쏟아부어진 추가 대책이 가하는 압력만큼 빠르게 현장(범죄가 일어나는 현장)에 압력을 가하지만 그 눌림은 잠시 잠깐 힘으로 진정(鎭靜)시킨 진정(鎭靜)일뿐 

진정(眞情)으로 그들을 위한 변화를 주지 못하고 오늘도 그들은 같은 목소리를 어디선가 내고 있다. 

"신고해도 도움 받지 못할까 봐서요". "저는 처벌을 원하는 게 아니에요". "알려지는 게 두려워요"...

그러나... 우리는 그 부르짖음은 들을 수 없었고 영원한 침묵(주검)만 112를 통해 들려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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