잠을 설쳤다. 속상해서 속마음을 털어놓은 아들 녀석에게 취조와 충고를 하고, 다그치고 혼냈다.
아마도 육아프로그램에서 오은영 박사님이 하지 말라는 건 다 해놓은 내가 미워 자다가 깼던 모양이다.
학교 영어 시간에 짝꿍과 바꿔서 서로의 시험지를 채점했고 분명 맞는 답인데 짝꿍이 틀리게 채점했다고 했다. "바로잡았어"?라고 물으니, 그냥 귀찮아서 하나 더 틀리고 말았다고 했다.
'그냥', '귀찮아서'라는 말에 꾸역꾸역 삼키고 있던 화가 그만 솟구쳤다.
아니, 명백히 맞게 푼 걸 틀렸다고 채점한 친구에게 말하는 게 귀찮아서 말을 안 했다고? 도저히 이해가 가지 않았다. 사실할 말 못 하고 사는 아들의 모습에 울화통이 치밀었다.
home sweet home은 순식간에 취조를 하는 무시무시한 경찰서 뒷방으로 뒤바뀌었다. 도끼눈으로 아이를 채근하기 시작했다.
"그게 왜 귀찮은 일이야? 넌, 네 점수 하나하나가 그렇게 하찮아?"
아이는 머뭇거리다가 자세한 사정을 털어놓는다.
사실 지금 짝꿍과 작년에 같은 반이었고 그때도 짝꿍이었는데 그때도 똑같은 일이 생겨 자신이 쓴 답이 맞다고 주장해 결국 맞다고 처리했는데 그 친구가 그 일로 다른 아이들에게 자기 흉을 보는 걸 들었다고 했다. 하필 그날 친하게 지내던 친구가 조별과제를 같이하지 않겠다고 돌변했고 교묘히 따돌림을 당하는 느낌이 들어 상처받은 날 그런 일까지 생겨서 너무 힘든 하루였다고 했다. 다시는 그런 일을 겪고 싶지 않다고 생각이 들었고 그래서 이번에는 그냥 넘어가고 싶다고 했다.
아이의 이야기가 짠하면서도 계속 화가 났다.
"그랬어? 힘들었겠다". 하고 아이의 손을 감싸 앉았다. 그렇지만 이렇게 억울한 일을 당해도 가만히 당하고만 있는 일이 반복되면 안 될 것 같다는 조바심이 들었고 내일 학교에 가서 선생님께 말씀드리고 사실관계를 바로 잡자고 했다. 아이는 어쩔 줄 몰라하며, 이번 한 번은 그냥 넘어가고 싶다고 했다. 그리고 다음 날 선생님께 말씀드리면 자신이 고친 게 될 수 도 있지 않냐고도 했다. 몇 번 더 설득을 해보다가 그럼 다음번에 이런 일이 있으면 절대 당하고 있지 말라는 조건을 붙였다. 아들은 엄마에게 괜히 말했다고 투덜거렸다. 혼나기까지 해서 억울하다고도 했다. 요즘 들어 부쩍 엄마랑 충돌이 잦다나?
평소 드라마를 보며 내가 꿈꾸던 엄마의 모습은, 쿨하고 담백한 충고와 따뜻한 공감을 해주는 엄마이다. 아이들이 포근하게 기대고 싶고 힘이 들 때마다 생각나고 찾아오게 되는 그런 모습이었다. 오늘 난, 끈적거리고 불같은 호통과 너무 많은 충고를 퍼부었다. 포근함과 거리가 먼, 세탁을 오래 하지 않아 쩐내가 나고 찐득거리는 담요로 아이의 마음을 덮어주는 시늉만 해서 아이의 마음을 더욱 무겁게 만들었다. 드라마 '더 글로리' 속 주여정 선생의 '쿨'한 병원장 엄마나, '내 아이디는 강남미인'의 차은우의 엄마역할로 나온 박주미의 우아한 저음톤의 부드럽고 따뜻한 충고 따윈 '개'나 줘버렸다.
감정적이고 성급한 모습이 내가 가장 싫어하는 나의 모습인데, 어느새 아이도 나의 가장 드러내기 싫은 치부를 답습해 그대로 내게 보여준다. 상대적으로 느긋하고 감정의 기복이 적은 남편이 아이를 도맡아 키웠으면 더 좋지 않았을까 라는 생각도 자주 했다. 느긋한 그에게 이 일을 털어놓았다.
"만약 우리 아들이 아니라, 남의 집 애가 그랬다면 넌 뭐라고 했을 것 같아?"
"뭐, 다음부턴 안 그러면 되지,라고 짧게 말하거나 신경 안 썼을 거 같은데?"
"그래, 짧게 말하고 너무 깊숙이 파고들고 그러지 마, 다 알아들어."
예전 같으면 자기 자식일 인데 뭐 저렇게 여유 있나 하는 반감이 들었을 텐데 이상하게 남편의 말이 바로 납득이 됐다. '그래, 힘을 빼자.'
속상해서 엄마에게 털어놓은 건데 혼내기까지 했으니, 자기도 억울하고 속상할 텐데 바로바로 똑 부러지게 말하고 대응하는 것 자체가 어려운 아이는, 엄마를 통해 '숨고를 시간'이 필요했는지 모른다. 엄마의 너른 품 안에서 '용기'라는 걸 얻고 싶었을지도 모른다. 이렇게 하다가는 언젠가는 아이가 나에게 입을 닫아 버릴까 두려워졌다. 사춘기 아이와 사이가 멀어지는 가장 빨리 멀어지는 방법을 알 것 같았다. '이렇게만 안 하면 된다'는 확신이 들었다. 일단 힘을 빼고 부드럽게, 끈적거리지 않고 바삭바삭 담백하게, 그렇지만 긴 여운이 남는 멘트로 마무리를 짓는다. 나에겐 무척이나 어려운 일이라는 걸 안다. 그렇지만 해 낼 것이다.
한창 공무원 수험준비로 심신이 지쳐 지독한 불면증에 시달리다 친구가 살고 있는 일본에 다녀온 적이 있었다. 한국에 오는 길에 비행기 창문 밖을 보면서, 높은 곳에서 내려다보니 아래 세상이 한없이 작은 장난감 나라 같았다. '뭐 그렇게 바글바글 속을 섞이고 살았을까? 뭘 그리 괴로워했을까?' 란 생각이 들면서 이상하리만큼 내가 가지고 있는 고민의 무게가 줄어드는 걸 느꼈다. 불면증이 사라지고 마음의 여유가 생기면서 뭔지 모를 에너지가 채워졌다. 가벼운 마음으로 부담을 내려놓고 열심히 공부한 그 해, 원하는 시험에 합격을 할 수 있었다. 아이 일도 마찬가지 아닌가? 너무 사랑하는 아이의 일이지만 마음의 여유를 가지고 생각을 해봐야겠다. 멀리서 내려다본다는 생각으로 가볍게 접근하고 따뜻함을 잃지 않겠다.
이게 바로 사춘기 아이와 가장 빨리 좋은 사이가 되는 방법이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