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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위트립 Nov 28. 2021

혁명군 숙소에서 하룻밤

세계 10대 특색 숙소에서 하룻밤을 / 시안

요즘 호캉스를 즐기는 여행객이 늘고 있다고 한다. 익숙한 집을 떠나 호텔에서 하룻밤 자면서 여행 기분을 내는 것이리라. 여행 체질상 호캉스는 나와 관련 없지만 때로는 숙소에서 묵는 것 자체가 여행의 일부가 되기도 한다.

    

시안(西安)에서 묵었던 숙소, 칠현장(七贤庄) 유스호스텔(7 Sages Youth Hostel)이 그랬다. 칠현장은 원래 혁명 시기에 홍군(紅軍 공산당군)의 비밀 아지트로 이용되던 건물이었다. 국민당과 공산당이 연합한 국공합작(1936)이 이뤄지면서 홍군이 정규군인 팔로군으로 편입되게 되고 그때부터 칠현장은 팔로군의 공식 사무처로 쓰였다. 오늘날 칠현장의 절반은 영업용 유스호스텔이 되었고, 나머지 절반은 '팔로군 사무소 기념관'이라는 이름으로 일반에게 개방하고 있다. 이 유서 깊은 숙소가 궁금했다.

    





오늘날의 칠현장 유스호스텔(왼) & 1936년의 칠현장(오) ⓒ위트립


숙소에 들어서니 세계 10대 특색 있는 유스호스텔로 선정되었다는 게시물이 눈길을 끌었다. 중국적인 건축 양식에 공산 혁명의 발자취가 남아있는 곳이라 높은 점수를 얻었나보다. 칠현장은 단층 건물로서 꽤 넓었다. 중국스런 문으로 내부 공간을 여러 개로 나누어 놓았다. 객실 내부는 리모델링을 했는지 산뜻했다. 내가 잔 방이 혁명군의 숙소였을지도 모를 일이다.

    


칠현장의 뜰과 객실, 도미토리 객실도 있음. ⓒ위트립


숙소를 나와 담 모퉁이를 돌니 팔로군 사무소 기념관 입구였다. 혁명군 아지트에 묵었더니 우리 숙소 옆집이 이름만으로도 주눅 드는 ‘혁명 기념관’이란다. 1936년 당시의 칠현장 사진도 있고 옌안(延安)에서 공산당 대표가 칠현장을 방문했다는 내용도 적혀 있었다. 당시 홍군은 산시성(山西省)의 옌안에 근거지를 두었고 시안의 이곳은 홍군의 의약품 및 의료품 보급 기지로 쓰였다고 한다. 캐나다 의사 노먼 베쑨(Norman Bethune 白求恩)이 집도했던 지하 수술실과 진료실이 보존되어 있는가 하면 각종 회의실, 통신실, 식당, 침실 등의 시설도 전시되어 있었다.

    

팔로군 사무처 기념관(위).  지하의 수술실(아래 왼쪽) & 회의실(아래 오른쪽)


저서 《중국의 붉은 별》을 통해 중국 혁명을 서방 세계에 알린 미국인 기자 애드가 스노(Adgar Snow) 사진도 있었다. 그 외 중국 혁명을 도운 외국인들의 기록도 찾아볼 수 있었다. 우리에게 김산의 일대기 《아리랑의》의 저자로 알려진 님 웨일즈(Nym Wales), 아그네스 스매들리(Agnes Smedley) 등이 그들이었다.    

 

중국 혁명에 연대했던 외국인들. 님웨일즈(위_왼), 노먼베순(위_오), 애드가 스노(아래_왼), 아그네스 스매들리(아래_오)


공산 게릴라 홍군의 근거지였던 칠현장이 공식 군대 팔로군의 사무소가 된 것은 시안사변 때문이었다. 시안사변은 당시 다 죽어가던 중국 공산당을 긴급 수혈해서 기적적으로 살려낸 기회가 되었고 시안사변을 주도한 이는 장쉐량이었다. 중국 근현대사 연구자는 물론 공산당사(共産黨史) 연구자들조차 중국 혁명 승리의 뿌리는  ‘시안사변’에 있다고 입을 모은다.     


1936년 12월 12일, 시안에는 무슨 일이 벌어졌을까? 그날 시안에 주둔 중인 동북군의 지휘관인 장쉐량(张学良)이 양후청(杨虎城)과 함께 공산군 토벌을 격려하러 시안으로 온 장제스(石)를 감금하고 ‘내전 정지’와 ‘항일 투쟁’을 주 내용으로한 국공합작을 요구하게 된다.

 

시안사변의 주역, 장쉐량(왼)과 양후청(오)


시안사변 때 공산당 대표로 시안으로 와서 국공합작을 성사시킨 저우언라이(周恩來 주은래) 


당시 만주사변(1931년)을 통한 일본의 침략에도 불구하고 장제스는 항일보다 공산당 토벌에 혈안이 되어 있었고 혁명 근거지 대부분을 제거하였다. 그러나 국민당 내 일부 군지휘관과 민심은 ‘지금은 같은 민족끼리 싸움을 중지하고 힘을 합쳐 외세 일본에 대항해야 할 때’라는 여론을 형성해가고 있었다. 이런 분위기를 뒷배 삼아 장쉐량이 거사를 일으킨 곳이 시안에서 장제스가 머물던 화청지였다. 화청지의 장제스가 머물렀던 방과 뒷산에는 당시 장제스가 첫 공격을 받고 체포되기까지 4시간 동안의 급박했던 상황을 증언하는 총탄 자국이 지금도 남아있다. 

     

화청지 내 뒷산의 병간정(무력으로 간언한다는 뜻). 장제스가 숨었다가 잡힌 곳


시안사변을 계기로 국공합작이 이뤄지자 패색이 짙었던 홍군은 정규군이 되어 되살아났고 일본에 대항하는 한편 자체 세력을 키워갔다. 1945년 일본이 물러간 후 공산당이 국민당과의 내전에서 이기고 1949년 10월 1일 중화인민공화국의 깃발을 천안문에 꽂게 된다. 중국 자기네들 말처럼, '공산당이 없으면 신중국이 없다.' 그러나 장쉐량이 없으면 공산당이 이기지 못했을 것이다. 그러므로 장쉐량이 없으면 신중국이 없다.

     

한편 중국의 역사의 큰 물줄기를 일시에 바꿔놓은 시안사변의 주인공은 어떻게 되었을까? 장쉐량은 이후 장제스와 그의 아들에 의해 장장 53년간 가택연금을 당하게 된다. 장제스에겐 자신의 휘하에 있던 중국 본토를 공산당에게 내어주고 타이완으로 쫓겨오게 만든 장본인인 장쉐량이 철천지 원수였을 테지만 공산당은 왜 그를 외교적으로 풀지 못하고 타이완에서 평생 억류되도록 내버려 뒀을까? 90세에 가택연금에서 풀리자 중국도 타이완도 아닌 하와이에서 인생의 마지막을 보낸 그의 삶을 역사는 어떻게 평가해줄까? 

     

어쩌다 묵게 된 역사적 숙소에서 중국 현대사의 한토막을 접한 나는 아직도 궁금하다.

“장쉐량은 왜 시안사변 당시 장제스를 죽이지 않았을까?”

“시안사변 이후 다시 권력을 잡은 장제스는 왜 장쉐량을 죽이지 않았을까?”

세간의 이야기처럼, 장쉐량이 한때 썸타는 사이였던 장제스의 부인 쑹메이링(宋美龄) 때문에 장제스를 죽이지 않았을까? 장제스는 쑹메이링의 간청으로 장쉐량을 죽이지 못했을까? 아니면 셋 사이의 애증의 삼각관계를 넘은 역사적인 판단에 의해서였을까?

    

진시황의 병마용갱은, 한국인이라면 가본 적은 없어도 안 들어본 적은 없는, 시안 관광을 하드 캐리 하는 명소이다. 시안은 화청지와 황제의 능들이 옛 고도의 지위를 엄호하고 있고, 아랍과 페르시아 서역의 향기가 곳곳에 배어 있는 실크로드의 교역의 중심지다. 동시에 시안은 중국 현대사에 큰 획을 그은 도시다. 시안에 간다면 시내에 흩어진 시안사변의 흔적을 한두 군데라도 찾아보길 권한다. 장쉐량의 공관, 화청지의 오간청과 병간정을 포함해 8군데가 시안사변 유적지로 지정되어 있다고 한다.

     

중국 여느 도시 중 시안만큼 이야기를 많이 품은 도시가 또 있으랴. 시안은 고대 수도로서의 문화 관광뿐 아니라 ‘혁명의 흔적을 상품화'한 '홍색(紅色) 관광'의 메카가 될 수 있다. 스토리텔링과 관광 인프라를 조금만 더 보태면. 내가 왜 남의 나라 남의 도시 관광 정책까지 거들고 있지? 이쯤 되면 나의 오지랖도 글로벌 수준?? 홍군 숙소에서 하룻밤 자더니 나도 모르게 분홍물이 들었나???




※ 참고 : 중국의 붉은별(애드가 스노, 두레출판사)

            차이나는 도올 10회(JTBC)

            중국인 이야기4(김명호, 한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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