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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위트립 Oct 29. 2022

쓰레기봉투는 여행하지 않는다

한달살기 여행 인증법

퇴직 후 '한달살기 전국일주' 중입니다. 한달살이와 여행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3월에 길을 나섰다. 이름하여 '한달살기 전국일주'. 1년간 한 달에 한 도시씩 옮겨 다니며 '살며 여행하기'가 나의 프로젝트다. 무모해 보이는 이 여행도 8개월 차에 접어들었고 이제 여덟 번째 한달살기가 끝나가고 있다.


월초면 새 도시에서 한 달을 시작했고 월말이면 대구 집으로 돌아왔다. 집에 오니 나보다 정주(定住) 본능이 더 강한 남편은 안정감을 갖는 눈치였다. 둘 사이의 타협점이 월말 4박5일이다. 집에 와서 정서적 안정감을 충전한다. 화분에 물도 주고 양념통도 보충하고 계절에 따라 여행 짐에서 옷가지와 이부자리도 바꿔 넣는다. 가족 일을 처리하기도 하고 사람들을 만나기도 한다. 그리고 달이 바뀌면 새로운 한달살이 삶터이자 여행지로 떠나기를 반복해왔다.


내 친구 하나는 그렇게 여러 달을 다녀도 아직도 재미있냐고 내게 물었다. 내 대답은 바뀌지 않았다. "음, 생각보다 재미있고 여전히 낯선 도시가 설레네."


계획은 역시 계획이라 애초 생각과 달라진 여행지도 생겨났다. 거제도 한달살기 공모에 선정되는 바람에 예정에 없던 거제에서 한 달을 지냈고 부산 지인이 아파트를 제공해준다고 해서 부산을 두 번이나 가게 되었다. 지금까지 여행지와 수정된 계획은 다음과 같다.


3월 부산 남구  /  4월 거제 /  5월 제주 /  6월 서울 /  7월 고성(강원도) / 8월 광주 /
9월 부산 북구 / 10월 청송 / 11월 목포 / 12월 인천 / 1월 (      ) / 2월 (     )  
* 후보지 : 군산, 서산, 여수, 대구


전국으로 한 달씩 여행을 다니는 새에 나는 전국구 생활자가 되었다. 거제에서 사 입은 아웃도어용 재킷 차림에 서울 청계천에서 산 신발을 신고 부산 양정동에 카메라 수리를 맡기러 갔다. 청송 우리 한달살기 집 식탁엔 강원도 고성 거진항에서 구입한 명태식혜와 부산 구포시장에서 산 마른김이 반찬으로 올라온다. 내 포항 친구는 자신의 집에서 제주와 고성과 청송 특산물을 진상(?) 받기도 하고 내 여행지 제주와 부산에 합류하기도 했다.


여행은 기부라고 한다. 강원도 고성의 여행 안내 리플릿에서 본 문구다. 생활인들은 매일 벌이 하느라 고된데 한가롭게 여행이나 하고 다니는 내게 미안함을 덜어준 문구다. 다니다 보면 여행자가 누리는 게 너무 많아 '여행은 기부가 아니라 혜택'이란 생각이 든다.


우리나라의 여행 인프라가 너무 잘되어 있어 놀랐다. 시내버스와 전철 등 대중교통의 편리함과 쾌적함은 말할 필요조차 없다. 겨울엔 따뜻한 온열 의자가 여름엔 쿨링포그가 냉기를 뿜어내는 버스정류장, 공항에서나 보던 휴대폰 충전구까지 달려있는 버스정류장 벤치도 봤다. 공공화장실은 내 집 화장실보다 더 깨끗할 뿐 아니라 한겨울엔 온수까지 콸콸 나온다. 한여름 폭염 때 광주 무등산 도서관 앞에서 구청에서 나눠주는 공짜 얼음물을 얻어 마신 적도 있다. 곳곳에 만나는 '증대된 공공성'은 여행자를 행복하게 했다.


한달살기 생활여행자로서 여행지에 가면 가장 먼저 하는 일은 그 도시의 쓰레기봉투 구입이다. 쓰레기봉투는 지역에서만 살 수 있고 지역에서만 쓸 수 있다. 쓰레기봉투는 지역성의 상징이 된다. 그래서 나는 쓰레기봉투로 내가 여행한 지역을 인증하기로 했다. '제주 올레길 스탬프'나 '한양도성 순례길 스탬프'처럼 도시마다 쓰레기봉투를 한 장씩 찍어 두는 것은 나만의 여행지 인증법이다. 쓰레기봉투는 여행하지 않으니까.


부산 남구(3월) / 거제시(4월) / 제주시(5월) /서울 서대문구(6월)


당분간 적어도 4개월간 여행은 계속될 것이고 쓰레기봉투 사진도 계속된다. 앞으로 어느 도시의 쓰레기봉투를 더 사게 될지 나도 궁금하다.


강원도 고성군(7월) / 광주시 서구(8월) / 부산 북구(9월) /경북 청송군(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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