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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위트립 Oct 28. 2021

지구에서 가장 아름다운 상처, 마령하 협곡

‘지구에서 가장 아름다운 상처’란 수식어가 따라다니는 곳이라면 무조건 가고 봐야 하지 않을까. 중국이 자랑하는, 세계 3대 트래킹지의 하나인 호도협(虎跳峽 후타오샤)도 이런 멋진 묘사는 얻지 못했다.

      

그동안 다녀온 위안머우의 토림과 웬양의 다락논, 싱이의 만봉림 등의 여행지가 사진 한 장에 꽂혀서 갔다면 싱이의 마령하협곡(谷 마링허샤구)은 ‘지구에서 가장 아름다운 상처’란 문구 하나에 낚인 곳이다. 얼마나 깊고 얼마나 멋지길래 이런 낭만적인 표현이 따라다니는 걸까?

     

만봉림과 마령하 협곡 둘다 싱이에서 시내버스로 갈 수 있다.


오전에 만봉림을 다녀오고 오후에 마령하협곡 관광을 나섰다. 시내버스 타고 30분을 가니 협곡 매표소 앞에 내려줬다. 입구에서 보니 관광객은 나뿐이었다. 아무리 비수기라도 명색이 중국 당국이 지정한 AAAA급 풍경구인데 중국의 그 많은 인구 중 단 한사람도 나와 동시간대에 여길 온 사람이 없단 말인가. 다른 복은 없어도 사람 피해 다니는 복은 있나보다. 그런데 오늘은 그 복이 좀 과했다. 매표소에서 여직원 둘을 봤다. 표를 끊고 계단길을 따라 협곡 속으로 들어가는 데 낮이어도 사람이 없으니 스산했다.

 

절벽 엘리베이터를 나 혼자 타고 협곡으로 내려갔다. 지금까지 내가 타 본 엘리베이터 중 가장 무서웠다. 엘리베이터보다 더 무서운 건 주변에 사람이 없다는 사실. 엘리베이터 타기 전 여직원 1명, 내리니 여직원 1명뿐, 아직도 다른 관광객 발견 못함!


케이블카와 엘리베이터 만드는 기술은 중국이 세계 최고가 아닐까? ⓒ위트립


수직 아래 가파르게 잘린 협곡 옆으로 길이 나있었고 잠시 걸으면서 본 폭포만 해도 10여 개는 되는 것 같았다. 우기가 아니라서 폭포 물줄기는 신통찮다. 이곳은 지표에서 수직 200m 아래로 날카롭게 패인 협곡이 70km 넘게 이어지고 양쪽 석회암 절벽에서 떨어지는 폭포만 50개가 넘는다고 한다. 관광지로 개발된 1/10 구간만 걸을 수 있다. 협곡을 왔다 갔다 하며 반대편 경치를 감상했다. 폭포도 멋있지만 수직 절벽에 치렁 치렁 늘어진 이끼 더미가 장관이었다. 층층 이끼를 가르는 물줄기와 은빛 물보라가 독특한 분위기를 연출했다.

      

폭포가 수시로 이어지므로 지루할 틈이 없다. ⓒ위트립


경치 보느라 잠시 나 혼자란 걸 잊었다가 다시 주위를 둘러보니 아직 아무도 보이지 않는다. 순간 폭포 물소리가 공포감을 자아낸다. 트래킹 길을 따라 걸을수록 무슨 공포 세트장에 들어가는 기분이 든다. 이곳은 외딴 협곡에 여자 혼자 넣어두고 담력 테스트를 하는 곳? 난 나 홀로 무서움 놀이 중?

     

이곳의 폭포는 이름하여 '층층 이끼 폭포'들이다. ⓒ위트립


협곡 따라 걷다가 무섭기도 하고 더 걷고 싶은 흥이 안나 서둘러 관광을 끝냈다. 나오면서 보니 7-8명의 한 무리의 가족이 협곡으로 들어가고 있었다. 진작 만났다면 저 사람들 뒤에 졸졸 따라다니면 되는 건데.... 이게 바로 '비수기 평일 나 홀로 관광의 비애'구나.

     

석회암 지역의 물빛 인증~ 결국 이곳도 중국 남방 카르스트의 일부이다. ⓒ위트립


싱이 시내 숙소 근처로 돌아오니 4시쯤 되었다. 지금부터 뭘 하나? 숙소에 들어가도 할 일이 없다. 세상에 살다 보니, 아무 할 일이 없어 뭘 할지 모르는 이런 하얀 도화지 같은 시간도 만나는구나. 자는 시각을 최대한 빨리 잡아 9시쯤 잔다 쳐도 지금부터 5시간이 빈다. 이게 또 무슨 미션인가? “중국의 작은 도시 싱이에서 5시간 때우기. 단, 숙소는 와이파이 안됨. 주변에 와이파이되는 맥도날드나 카페 없음.”


동네 구경은 이틀 전 싱이에 도착하는 날 다 했고 마땅히 쇼핑할 것도 없다. 오가는 사람은 나와 아무런 연결끈이 없는 사람들이다. 이런 연결끈을 일부러 끊기 위해 여행을 오는데 공중에 붕 뜬 것 같은 이 느낌은 뭘까? 아까까진 혼자라 무서웠고 이젠 혼자라 외롭다. 이제 중국 한 달 여행의 막바지라 근처 돌아다니는 것도 시들하고 귀찮다. 정말 정말 아무것도 할 일이 없다. 심심하다. 그래서 뭘 하지?


그래서 찾은 곳은 숙소 바로 앞의 PC방이었다. 밀린 한국 드라마를 보며 3시간을 때웠다. 드라마 제목은 한국에서 내가 보던 주말 드라마 ‘내 딸 서영이’. 미국 한인 사이트에 접속해서 봤다. 지금 이 상황은 뭐지? 한국에서 만들어 상영 중인 드라마를, 중국인이 중국 사이트에 불법적으로 올려뒀고, 이걸 미국의 한인 사이트에서 링크 걸어 놓은 걸, '한국 여자가 중국 PC방에서 보고 있는 시추에이션'이 되겠다.

      

PC방에서 질질 울면서 드라마를 보고 나오니 7시. 밖이 깜깜하다. 식당 한 곳을 골라 저녁을 먹고 숙소로 가서 9시경에 일찌감치 잠자리에 들었다. 싱이를 마지막으로 한 달간의 여정도 진.짜.로. 끝이 났다. 다음날 쿤밍으로, 또 쿤밍에서 비행기 타고 청두로, 청두에서 다시 한국으로 돌아가는 일정만 남았다.


그래도 마지막 여행지이니, '마령하협곡' 한줄평을 한다면? ‘지구에서 가장 아름다운 상처’ 협곡에서 외로움 놀이하며 ‘절대 고립감’을 느꼈으니 "마령하협곡은 내 여행의 가장 아름다운 상처로 남은 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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