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행운, 김애란
<비행운>은 총 8개의 단편 소설로 구성되어 있다. 여타 다른 단편소설집들이 표제작을 제목으로 선정하는 것과 달리 <비행운>은 '하루의 축'에서 나온 특정 단어를 제목으로 설정했다. 비행운(飛行雲). 해설에서는 김애란의 비행운이 사실, 비행운(非行雲)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고 표현한다. 이처럼 <비행운>의 곳곳에는 비운(悲運)이 산재해 있다. 성공한 비행기가 남기는 행적을 동경하면서도 절대 그곳에 닿을 수 없는 비운(悲運)을 타고 난 사람들의 이야기. 그것이 단편의 핵심이다. 그래서 나는 여름과 닮은 소설에 눈을 뗄 수 없었다. 축축한 공기에 질식할 것 같은, 그러면서도 건조해질 나날을 고대하는 나는 천천히 그들의 비행운(飛行雲)을 음미했다.
개중 가장 미식이라 평가할 만한 소설으로는, '물속 골리앗'을 꼽을 수 있겠다. "장마는 지속되고, 수박은 맛없어진다."는 아름다운 문장이 등장하는 단편이기도 하다. 어딘가에서 지나가듯 들어보았던 이 문장을 실제로 목격하자마자 흥분해서 사진을 몇 장이고 찍은 기억이 생생하다. 읽으면서는 한순간도 긴장을 늦추지 못하고 주인공의 행적을 바삐 따라갔는데, <비행운> 안에서 가장 비극적인 소설이다. 그런 소설과 진득하게 엮이다 보니 나중에는 힘이 다 빠져 다음 단편을 읽지 못할 지경이었다. 고립, 상실, 결핍을 모두 가진 최악의 최일선 끝에 선 아이가 살아남기 위해 헤엄치는 아름다움을 간직한 이야기는, 읽는 내내 그의 생존을 간곡히 바라게 되면서도 한편으로는 그 결말이 비극에 이를 것 같다는 위태로움 속에 끝을 맺고 만다. 단편 소설의 짧은 서사와 플롯 안에서 김애란의 유려한 문체는 정점에 다다른다. 누군가는 실험적이라 느낄 수 있을 정도로 묘사가 가득한 소설이지만, 과하다는 생각이 들지 않게 담백하게 서술했다. 더불어 절망과 희망이라는 양가적 감정을 이렇게 단순하게 표현할 수 있다니! 그 깊이에 경탄을 표한다.
한편 '그곳에 밤, 여기에 노래'는 이전에 문학 비평 동아리를 통해 접해본 적 있는 작품이었다.(사실 나는 김애란의 작품을 안 읽어왔다고 자부해 왔지만, 이것 하나는 심도 있게 읽어본 전적이 있음을 책을 읽으며 알게 되었다···.) 그때의 내가 이 작품을 어떻게 평가했는지에 대한 서평이 남아 있어 한 번 읽어 보았는데, 지금과는 다른 관점이 보여 사뭇 놀라웠다. 그 글에서 나는 "용대는 자신의 것을 빼앗아 가려는 무서운 질병에 떠밀려 유일한 이해자 명화를 포기한다."라고 서술했는데, 지금의 나는 용대가 명화를 잃을 수 밖에 없었던 필연적 상황에 지극히 공감했기 때문이다. 용대는 포기한 것이 아니라 발버둥 친 것이다. 단지 반항의 방향이 좋지 않게 튀었던 것일 뿐. 그는 명화를 상실한 이후에도 라디오를 틀고 서울의 새벽을 떠돌며 그녀의 유산을, 그녀의 언어를 천천히 몸에 새긴다. 따라서 이 부분은 정정한다. 한편으로 내가 어떻게 이런 문장을 썼을까, 하는 부분도 있었는데 "그들은 각자의 외로움을 채우기 위해 서로를 탐했지만, 결국엔 중국어와 한국어로 대화하고 있었으니 처음 듣는 노래를 듣는 것처럼 서로를 이해할 수 없었음은 분명하다." 바로 이 부분이다. 당시와 지금의 이해관계가 다르더라도, 그때의 나와 현재의 나는 상당히 비슷한 감상을 공유하고 있었다. 그것은 결말까지 이어져, 책을 읽은 다음 또다시 짙은 여운에 잠길 수 있었다. “제 자리는 어디입니까?”에서 언제나 ‘어디’가 중요하다. 용대는 어디를 알지 못한다. 그에게는 고향도, 집도, 명화의 품도 없다. 택시 한 대를 가지고 손님의 어디를 묻는 그는 정작 그의 어디를 갈 수 없다. 끝나지 않는 밤의 속도에 맞추어 먼 길을 달릴 뿐이다. 지독한 상실을 겪은 후 외로움은 여운을 주며 흘러들어왔다. 마치 항상 오는 밤처럼, 그리고 틀면 흘러갈 뿐인 노래처럼.
'호텔 니약따'를 읽으면서는 뜬금없이 소름이 돋았는데, 올해 1월 내가 겪은 경험담과 엄청나게 유사한 상황이 찍어내리듯 그려진 단편이었기 때문이다. 올해 초, 나는 오랜 친구와 함께 일주일간 후쿠오카로 여행을 떠났다. 그런데 여행 스타일이 정말 안 맞는 나머지 종국에는 파국을 맞을 수밖에 없었다. 창과 방패의 싸움, 그리고 당장이라도 균형을 잃을 듯한 분위기 속에서 우리는 분쟁을 피하기 위해 현 상황에 대한 침묵을 택했다. 그것은 '은지'와 '서윤'도 마찬가지였다. 여행 중에 귀국만을 기다리던 우리는 어색하게 집으로 돌아왔다. 그러나 관계의 균열은 그대로 남아 여전히 진득하게 달라붙어 있었다. 어느 정도였냐면 당시의 불쾌한 기분이 그대로 남아 있는 탓에 그 친구와의 연락을 기피하게 될 정도였다. 얼마 전에 콘서트를 다녀온 친구가 엔플라잉에 대한 찬사를 적은 카카오톡을 보내지 않았더라면 올해가 지나가기 전까지 어떠한 연락도 없었을지 모른다. 그리고 그러한 화해의 손길에 부채감을 안고 있던 찰나 나는 '서윤'을 보며 거울 치료를 할 수 있었다. '서윤'과 '나'의 동질성 그리고 그들이 겪는 어색함이 나의 흑역사를 건드려 괴로운 마음이 치를 떨었다. 그래서 조금은 묵은 때를 긁을 수 있었다. 가끔은 비일상을 표방한 소설이 인생의 혜안을 제시해 주기도 했다. 그것을 인정한다. 그러므로 여름이 가기 전에 나 또한 그에게 재결합의 문자를 시도해 봐야겠다.
'벌레들'과 '하루의 축'을 통해서는 처절한 모성애를 느낄 수 있었다. 빈곤 속에서 가족이란 얼마나 나약하고 부질없는 연대인지, 그리고 그 안에서 태어난 자식이란 왜 헤아릴 수 없을 절망의 존재로 성장할 수밖에 없는지 공감할 수 있었다. 생명의 축복이 누군가에겐 절망의 단초가 될 수밖에 없다는 사실은 어째서 이렇게 서글플까. '너의 여름은 어떠니'와 '서른'을 읽으면서는 공감성 수치 속에 나뒹굴었다. 타인에 의해 느낀 강제적 절망감과 부끄러움에 공감하며, "너는 자라 내가 되겠지······ 겨우 내가 되겠지."라는 말에 한없이 고개를 끄덕이며. 그럼에도 미워할 수 없는 활자 속 그들을 떠올린다. 마지막으로 ‘큐티클’의 나를 보며 곧 그의 나이를 쫓아갈 나를 상상해 본다. 허영심에 매몰될 수 밖에 없다는 것을 알지만, 그럼에도 너무 깊숙이 빠지진 말기를, 나를 잃지 말기를 소망한다.
<비행운>을 통해 나의 비행운을 그려본다. 가려진 구름 사이로 빠르게 종적을 남기고 사라질 허상을 좇으며, 나의 비행운은 어디에 있을지 섣불리 가늠해 보며, 필연적으로 찾아올 비운(悲運)에 대비한다. 그리고 너른 인생의 가시밭길 속에 내가 가진 비행운(飛行雲)만은 잃지 않길, 결국엔 비행하길 기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