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지만 어쩌겠어 버티는 수밖에
대학 시절 군대 간 동기들이 제일 싫어하는 말 중 하나가 휴가 나왔을 때 “또 나왔어?”라는 말이었다. 입영통지서가 나오면 마치 다시는 못 볼 사람들처럼 환송회를 거하게 한 후 다음날에도 술에서 절대로 깰 수 없는 상태로 보내는 게 통과의례였다. 첫 휴가땐 대부분 동기들이 다 나와서 환영을 해주지만 두 번, 세 번 되풀이되면 하나둘씩 빠지기 시작하다 소수인원만이 남는다. 다들 하는 건데 특별할 것도 없고 첨엔 신기했던 군생활의 무용담이 두세 번 듣다 보면 비슷비슷한 레퍼토리가 되풀이돼 시큰둥해진다. 본인들은 학수고대하던 휴가를 나왔는데 갈수록 식어가는 분위기에 "또 왔어?"라는 말까지 들으면 굉장히 섭섭했을 것 같다. 군에서의 시간과 민간에서의 시간은 다르게 흘렀던 것 같다.
우리 딸에게 유학은 군대 간 것과 비슷한 것 같다. 끝날 때까지 참고 견뎌고 버텨야 하는 곳이다. 대학을 가기 위해 의무적으로 복무를 하고 있는 상황이다. 군대에서 휴가와 같은, 오매불망 손꼽아 기다리던 방학. 한국에 와서 그동안 못했던 일들이 너무나 많은데 엄마는 잘 호응해 주지도 않고 시간낭비 하는 거 아니냐, 공부해야 하는 거 아니냐는 소리를 해대니 마치 '또 나왔어'라는 말을 들은 것처럼 상처를 받았으리라. 이렇게 힘들걸 왜 간다고 했어? 이럴 줄 몰랐어?라는 말이 목구멍까지 올라오지만 본인인들 알았겠나 이렇게나 힘들 줄.
영국유학을 하면서 여러 가지 불편하고 어려운 점이 많겠지만 아이의 표면상 불만은 다음과 같다.
1. 으스스한 날씨
해가 나오는 날이 많지 않다. 이젠 왜 해만 나오면 그 많은 유럽인들이 돗자리를 들고 나와 일광욕을 하는지 이해가 된다. 그래서 우울한 기분이 들 때가 많단다. 비단 날씨 때문에만은 아니겠지만 날씨가 이렇게 영향을 많이 주는지 미처 몰랐다. 한국은 한 겨울에도 해가 가득한 날이 너무 많이 많으니까. 영국은 겨울에도 영하로 잘 내려가지 않는다. 최저 기온이 영하로 찍히는 날이 며칠 있긴 하지만 대부분 영상이다. 눈이 오긴 와도 쌓이지 않을 정도로 혹독한 추위는 없기에 난방을 덜 한다. 바닥 난방은 당연히 없고 그래서 더 춥게 느껴진다. 겨울을 대비하지 않은 11월과 끝났다고 생각하는 3월이 을씨년스러워 오히려 더 춥게 느껴지는 기분처럼. 한국에서는 추위를 전혀 타지 않은 아이였는데.
2. 맛없는 음식
영국사람들은 진짜 음식에 신경을 쓰지 않는 것 같긴 하다. 5대 영양소를 골고루 먹어야 한다는 생각을 전혀 생각하지 않는 듯하다. 우리나라의 훌륭한 중학교 급식의 맛을 알기도 하고 원래 음식을 무조건 적으로 받아들이는 스타일이 아니어서 기숙사의 음식에 대해서 꽤 큰 불만이 있다. 맛있는 음식은 기대하지 않지만 신선한 채소와 과일은 차치하더라도 생전 듣도 보도 못한 음식이 헐벗은 듯 나와 생존의 투지 외에 음식에 대한 즐거움을 전혀 느낄 수가 없단다. 먹는 것이 굉장히 큰 기쁨 중의 하나인데 크게 느껴지는 부분인 듯하다.
3. 그리운 친구
외국에 나가면 애국심이 절로 생기는지 대부분 아이들이 자기 나라 친구들과 어울린다. 러시아, 베트남, 중국, 우크라이나 등등 각 나라별로 몰려다닌 다는데 한국아이들은 상대적으로 덜 뭉친다고 한다. 게다가 마음을 나눌 친구가 없어 외롭고 힘들어한다. 어렵고 힘들어도 맘에 맞는 친구가 있으면 같이 헤쳐나갈 수 있을 정도로 친구의 역할이 굉장히 중요한 시기인데 그렇지 못해 너무나 안타까운 마음이 든다. 이해한다. 친구의 그리움을~
4. 너무 다른 공부 방식
한국은 입시위주의 주입식 교육으로 밑줄 쫙, 동그라미 팍, 별 2개, 선생님이 중요한 것 아닌 것 일일이 다 가르쳐 준다. 영국은 문제집도 없고 학원도 없고 물어봐도 속 시원히 대답도 안 해주고 한국처럼 열의도 없고. 달라도 너무 다른 교육 방식에 적응하기 쉽진 않다. 시간이 지나면서 익숙해지겠지만 아이에겐 너무 시간이 없다..
5. 좁은 기숙사
딱 필요한 공간만 있다. 침대, 책상, 아주 약간의 공간. 화장실, 샤워부스도 좁고 수납공간이 넉넉지 않으며 세면대는 미니 사이즈. 답답할 것 같긴 하다. 런던도 아니고 시골인데 공간을 좀 넉넉하게 지을 것이지. 난생처음 엄마 없이 혼자 지내는 생활이 익숙지도 않고 여러 가지 불편한 점이 많긴 하겠지. 그나마 1인 1실에 화장실이 방안에 있어서 다행이긴 하지만~
6. 시골 환경
사방에 건물 몇 개와 나무뿐인 들판이다. Tesco를 가려고 해도 최소 10분 이상 보행로가 잘 확보되지 않는 길을 걸어가야 해서 큰 맘을 먹어야 갈 수 있다. 같이 동행할 친구도 찾아야 하고 돌아오는 길은 Uber도 타야 하니 혼자 가기에는 무리다. 도시에서, 그것도 모든 것이 다 갖춰져 있는 서울에서 살다가 영국의 어느 이름도 몰랐던 시골마을에 덩그러니 떨어져 있으니 창살 없는 감옥에 있는 것 같을 것이다.
세상이 좋아져서 매일 카톡을 주고받고 통화도 하면서 일상을 공유하고는 있지만 함께 살을 대고 같이 있는 것과는 다르다. 어떤 상황에 있고 상태가 어떤지 아이가 얘기하는 부분은 알 수 있지만 대면을 통해 감지할 수 있는 표정, 제스처에서 느낄 수 있는 감정은 빠져있어 모든 걸 다 파악하긴 어렵다. 짧은 시간에 많을 걸 얘기할 수도 없으며 모든 걸 다 말로 표현할 수도 없으니 뉘앙스를 파악해서 알아채 주는 부분이 필요한데 비대면으로 커뮤니케이션을 하는 것은 뭔가 한 꺼풀 씌워져 겉도는 것 같은 기분이다. 그래서 아이는 계속 외형적인 불만을 토로한다. 뭐가 맘에 안 들고 뭐 때문에 짜증 나고...
다 이해된다. 그럴 것 같다. 한창 예민한 시기이고 공부에 대한 스트레스도 많을 거고 투정 부릴 엄마도 옆에 없고 마음을 나눌 친구도 없고. 게다가 본인이 꼭 가겠다고 우겨서 떠난 유학이니 미주알고주알 말 못 하는 심정이야 오죽하겠나. 잘할 수 있을 것이라 마음을 먹었지만 막상 해보니 생각보다 쉽지 않을 것이다. 풍성했던 머리도 많이 빠지고 소화가 되지 않아 음식도 충분히 먹지 못하고 여드름 하나 나지 않던 얼굴에도 얼룩덜룩 뭐가 나서 스트레스가 눈에 띌 정도로 외형에까지 영향을 주고 있다.
스트레스는 그 근본 원인이 해소되기 전에는 사라지지 않는다. 겉으로 사라진 듯해도 깊은 곳에 잠재되어 있을 뿐 언제든 발현 가능하다. 가끔 별것도 아닌 것에 폭발하는 이유가 이것 때문이다. 폭탄처럼 언제 터질지 모르는 채로 남아있다. 마음을 먹는다고 한 번에 사라지지 않는다. 의지가 약해서 그런 것이 아니라는 걸 안다.
이렇게 힘들 줄 알았으면 유학을 보내지 말걸. 하지 않아도 되는 고생을 하는 것 같아 안쓰럽고 미안하고 측은하다. 하지만 어쩌겠어. 이때까지 오느라 고생했고 조금만 지나면 목표에 다다를 수 있으니 조금만 더 버티는 수밖에. 최종 시험이 끝나고 대학을 가야 지금의 스트레스 상황을 벗어날 수 있을 것이다. 하루하루 잘 다독이며 이 시기를 이겨낼 수 있도록 옆에서 최선을 다 할 것이다.
'엄마가 도와줄게, 같이 이겨나가자. 울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