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은 여자의 얼굴을 하지 않았다

스베틀라나 알레시예비치

by 유이

공포영화보다 전쟁영화가 훨씬 더 무섭다. 영화를 보는 내내 긴장을 한 탓에 온몸이 뻐근하고 두드려 맞은 듯이 아프고, 보고 나면 내가 한바탕 전쟁을 치른 듯 너무 피곤해 전쟁영화를 보는 것이 너무 힘들다. 영화관처럼 어쩔 수 없는 상황이 아니면 한 번에 쭉 연결해서 보지 못한다. 몇 번을 스톱시켰다가 마음을 좀 진정시킨 후 보기도 하고 자극적이거나 극도의 긴장감이 도는 장면은 스킵해서 넘기며 보기도 한다. 전쟁영화는 너무 무섭다. 영화마다 관객에게 전달하려는 중요한 메시지가 따로 있겠지만 전쟁 영화를 볼 때마다 확연하게 와닿는 메시지는 절대로 전쟁은 일어나면 안 된다는 거다.


이 책은 여자의 얼굴을 하지 않은 전쟁에 참여한 10대 소녀들의 이야기를 인터뷰 형식으로 전해준다. 이를 통해 알려지지 않은 또 다른 전쟁의 실상을 자세히 들여다볼 수 있게 된다. 가족에게도 하지 않았던, 아니할 수 없었던 얘기를 몇 십 년이 지났는데도 어제 일처럼 똑똑히 기억하는 그들의 목소리를 통해 또 다른 시선으로 전쟁을 보게 되었다. 전투 속에서 또 다른 전투가 진행되고 있었음을... 읽고 나서는 영화 보듯 똑같이 힘들었고 또다시 전쟁은 일어나서는 안된다는 생각을 강하게 했다. 절대로 안된다...


지금 이 시간에도 러시아와 우크라이나가 전쟁 중이란 사실이 믿어지지 않는다. 그것도 러시아가 먼저 전쟁을 일으켰다. 2차 세계대전 중에 수없이 많은 사람들이 겪어야 했던 고통을 조금이라도 공감한다면 어떻게 전쟁을 일으킬 수가 있단 말인가? 인간의 존엄성이 무시되고, 깊숙이 감춰진 악마 같은 민낯을 드러내며, 매일 생 지옥을 경험하며 언제 죽을지 모르는 불안함 속에서 억울하고 허무하게 생명들이 꺼져가는 그 전쟁을 어떻게 스스로 일으킬 수가 있단 말인가? 전쟁이 끝난다 하더라도 전쟁을 경험한 수많은 사람들에게는 또 다른 전쟁이 시작되어 그로 인해 육체적, 정신적으로 제대로 된 일상을 살지 못하고 있다는 걸 앞선 경험으로 충분히 인지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옮긴이의 말을 빌어 이 책을 읽어야 할 이유를 전한다.

"우리의 탐욕과 교만, 그리고 폭력과 야만에 눈감아버리는 비겁함이 사라지지 않는 한, 전쟁은 멈추지 않을 것이다. 마치 우리의 유전자 속에 전쟁이라는 DNA가 새겨져 있고, 그래서 전쟁의 대물림이 필연인 것처럼. 그것이 바로 우리가 이 책을 읽어야 할 이유다. 우리의 의식이 늘 깨어 있도록 자신과 주위를 돌아보며 스스로를 채찍질하고 타인의 아픔과 고통을 외면하지 말아야 할 이유다." -옮긴이 박은정-


이 책은 오랫동안 수백 명을 인터뷰해 모은 다큐멘터리 산문이다. '목소리 소설 Novel of Voices'이라는 독특한 문학 장르를 창시한 스베틀라나 알레시예비치의 작품으로 2015년 노벨상을 수상했다. 이 책의 집필은 1983년에 끝냈지만 영웅적인 여성들에게 찬사를 돌리지 않고 오히려 그들의 아픔과 고뇌에 주목한다는 사실 때문에 보류되다 2년 뒤인 1985년 출간되었으나 1992년 이 책에 대한 재판까지 열렸다고 한다. 수많은 국제상을 수상을 하였고 35개 언어로 번역 출간되었으며 수백 편의 영화와 방송을 위한 대본으로 사용되었다.

전쟁은 인류 역사의 영원히 풀리지 않는 수수께끼다



사람이 전쟁보다 귀하다(일기장에서)


우리는 전쟁이 없는 세상을 알지 못했다. 전쟁의 세상이 우리가 아는 유일한 세상이었고, 전쟁의 사람들이 우리가 아는 유일한 사람들이었다. 나는 지금도 다른 세상이나 다른 세상의 사람들을 알지 못한다. 그런데 다른 세상, 다른 세상 사람들은 정말 존재하기나 했던 걸까?


전쟁이 끝난 뒤 내 어릴 적 시골마을은 여자들의 세상이었다. 여자들의 마을. 남자 목소리를 나는 기억하지 못한다. 그때의 풍경은, 마을 여자들이 전쟁을 이야기하고, 흐느껴 울고, 흐느끼듯 노래하던 모습으로 내 기억 속에 남아 있다.


오랫동안 찾아 헤맸다……어떤 말을 써야 내 귀에 들려오는 이야기들을 제대로 전달할 수 있을까? 내가 느끼는 세상을, 내 눈이 보고, 내 귀가 듣는 이 세상을 표현해 낼 수 있는 장르를 나는 애타게 찾았다.

어느 날 우연히 [나는 화염에 휩싸인 마을에서 왔다]라는 책을 읽게 되었다. 아다모비치, 브릴, 콜레스니크의 소설. 그런 충격은 우연히 도스토옙스키의 작품을 읽으며 충격받았던 날 이후로 처음이었다. 소설의 형식은 놀라웠다. 소설은 삶 그 자체의 목소리를 담고 있었다. 소설은 내가 어렸을 때 들었던 이야지, 지금도 거리와 집과 카페와 전차에서 들려오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쓰고 있었다. 바로 이거야! 세상은 다시 돌아가기 시작했다. 그토록 찾아 헤매던 것을 찾은 것이다. 사실 찾을 줄 알고 있었다.

알레시 아다모비치는 나의 스승이 되었다……


여자들의 이야기는 전혀 다른 것이고, 또 여자들은 다른 것을 이야기한다. ‘여자’의 전쟁에는 여자만의 색깔과 냄새, 여자만의 해석과 여자만이 느끼는 공간이 있다. 그리고 여자만의 언어가 있다. 그곳엔 영웅도, 허무맹랑한 무용담도 없으며, 다만 사람들, 때론 비인간적인 짓을 저지르고 때론 지극히 인간적인 사람들만이 있다. 그리고 그곳에서는 사람들만이 아니라 땅도 새도 나무도 고통을 당한다. 이 땅에서 우리와 함께 살아가는 모든 존재가 고통스러워한다. 이들은 말도 없이 더 큰 고통을 겪는다.

하지만 왜? 나는 여러 번 자신에게 물었다. 절대적인 남자들의 세계에서 당당히 자신의 자리를 차지해 놓고 왜 여자들은 자신의 역사를 끝까지 지켜내지 못했을까? 자신들의 언어와 감정들을 지키지 못했을까? 여자들은 자신을 믿지 못했다. 하나의 또 다른 세상이 통째로 자취를 감춰버렸다. 여자들의 전쟁은 이름도 없이 사라져 버렸다……

나는 바로 이 전쟁의 역사를 쓰고자 한다. 여자들의 역사를.


나 혼자만 엄마한테 돌아왔어…


나는 예전에, 고통은 사람을 자유롭게 한다고, 고통을 견뎌낸 사람이야말로 자기 삶의 온전한 주인일 거라고 생각했다. 고통의 기억이 자신을 보호한다고. 그런데 이제 언제나 그런 것만은 아니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 이런 앎, 평범한 보통의 삶에는 있기 힘든 이런 특별한 앎은 손댈 수 없도록 따로 보관해 놓은 비축물이나 겹겹이 층을 이룬 광석 틈의 희미한 금가루처럼 별도의 공간에 존재한다. 한참을 속이 빈 암석을 공들여 벗겨내고, 함께 사소한 기억의 토적물을 헤집어야 한다. 그래야 비로소 반짝반짝 모습을 드러낸다! 선물처럼 찾아온다!


우리는 정말 어떤 사람들일까. 무엇으로, 어떤 재료로 만들어졌을까?
고통을 이겨낸 사람은 어떤 단단함을 가지고 있는지.
알고 싶다. 그걸 알기 위해 나는 이곳에 왔다…


니나 야코블레브나 비시넵스카야, 특무상사, 전차대대 위생사관

나는 왜 살아남았을까? 무엇을 위해? 생각해 보면……그건 아마 지금 이렇게 그때 이야기를 하기 위해서가 아닐까……


우리 집엔 두 개의 전쟁이 산다…


어쩌면 우리는 수시로 전쟁과 혁명을 치르느라 과거와 연대하며 혈통의 그물을 엮어가는 과거에 대해 자긍심을 가지는 법도, 우리는 서둘러 잊었고 서둘러 흔적들을 지워버렸다. 소중히 간직한 증언들이 생명을 위협하는 유죄의 증거가 될 수도 있었기에. 할머니, 할아버지, 딱 거기까지만 알고 누구도 그 이상의 조상은 알지 못한다. 뿌리를 찾으려 하지도 않는다. 역사는 만들어졌지만, 낮뿐인 삶이었으며 기억도 짧았다.


녹음기는 사람의 말을 녹음하고 어조도 그대로 담아낸다. 짧은 침묵, 울음소리, 망연자실해하는 소리까지도, 나는 이야기란 게 원래 시간이 지나 글로 옮겨질 때보다 말로 뱉어질 때 훨씬 더 많은 의미를 내포한다는 사실을 잘 안다. 말할 때 그 사람의 눈빛과 팔의 움직임을 ‘녹음하지’ 못하는 게 늘 안타깝다. 대화하는 동안 드러나는 그들의 삶, 즉 그들 본래의 삶과 그들 각자의 삶을, 그들의 ‘텍스트들’을 녹음하지 못하는 게 안타깝다.


사울 겐리호비치, 보병 중사, 올가 바실리예브나 남편

내겐 전쟁에 대한 구체적인 지식이 많은 반면, 집사람에겐 전쟁에 대한 감정이 더 많아요. 하지만 언제나 감정이 사실보다 더 분명하고 강력한 법이지. 우리 보병 중에도 소녀병사들이 있었어요. 우리 중에 소녀 병사가 한 명이라도 끼여 있으면 그만한 가치가 있었소. 당장 사기가 올라갔으니까. 당신은 상상도 못 할 거요….. 절대!

전쟁터에서 나는 더 나은 사람이 됐소……확실히! 내가 전쟁터에서 훨씬 괜찮은 인간이 된 건 분명한 사실이오. 그런 고초를 겪었는데 당연하지 않겠소. 수많은 고통을 봤고, 나 자신도 많은 고통을 겪었소. 그곳에선 살아가는 데 중요하지 않은 건 금방 제거 돼버리지. 아무짝에도 쓸모가 없거든. 그곳에서 그걸 깨닫게 됐소……하지만 전쟁도 우리에게 앙갚음을 했소……우린 그 사실을 인정하기를 두려워하지만……전쟁이 우리를 쫓아와 우리와 나란히 가고 있어요….


올가 바실리예브나 포드비셴스카야, 해군 일등하사관

전쟁을 잊고 싶으셨나요?

잊는다고? 잊는다……우리는 전쟁을 잊고 말고 할 능력이 안 돼요. 우리 힘으로 어떻게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지.

잊고 싶었어……그러고 싶어……단 하루라도 좋으니 전쟁 없이 살고 싶어. 전쟁 같은 건 까맣게 잊어버리고……하루라도 그런 날이 있었으면……


전화기는 사람을 쏘지 않잖아…


사람들은 다양한 모습으로 나를 맞이하고 이야기를 들려준다……

어떤 이들은 통화를 하자마자 이야기부터 꺼낸다. “ 생각나요……어제 일처럼 모든 게 다 기억나요……” 또 다른 이들은 만남과 대화가 이루어지기까지 한참 시간이 걸린다……“ 마음의 준비가 필요해요……다시 그 지옥으로 떨어지기 싫어요……” 발렌티나 파블로브나 추다예바. 그녀는, 끝까지 만남을 미루다가 마지못해 타인에게 자신의 불안한 세계를 열어 보이는 사람들 중 하나였다.


발렌티나 파블로브나 추다예바, 중사, 고사포 지휘관

당신은 이게 이해가 돼? 지금은 이해할 수 있는 일일까? 당신이 나를 이해해 줬으면 좋겠어……. 적개심이 없으면 총을 쏘지 못해. 그건 전쟁이었지, 사냥이 아니었어. 정치 수업시간에 읽었던 일리야 예렌부르크의 ‘놈들을 죽여라!’라는 글이 기억나. 몇 번을 만나더라도 만나는 대로 독일군을 죽여 없애라는 유명한 글이지. 당시엔 모두 그 글을 읽었어. 외우고 다닐 정도였지. 그 글은 내 마음을 사로잡았고, 나는 전쟁 내내 가방 안에 그 글과 아버지의 ‘전사통지서’를 넣고 다녔어……쏠 거야! 총을 쏠 거야! 나는 복수해야만 했어……


베개 밑에 큰 수건을 숨기고 모두 잠들기를 기다렸어. 곧 다들 잠이 들었지. 마침 침대들이 철로 된 거였어. 그래서 수건을 침대에 잡아맨 다음 목을 매기로 했지. 다만 도중에 수건이 끊어질까 봐 그게 걱정이었어……그런데 마샤아줌마가 밤새 내 곁을 지키고 앉았는 거야. 아줌마가 나를, 어린 나를 지켰어. 밤새 한숨도 안 자고……어리석은 나를 보호했어……

승리의 날은 동프로이센에서 맞았어. 사실 승전하기 며칠 전부터 전선도 잠잠하던 참이었어. 총을 쏘는 사람도 없었고, 한밤중에 갑자기 경보가 울렸어. ‘공습이다!’ 모두 깜짝 놀라 일어났지. 그런데 바로 뒤이어 ‘승전이다! 적이 항복했다!’는 외침이 들려왔어. ‘적의 항복’, 그래, 그것도 좋았지만 우리를 정말 기쁘게 한 건 승리였어. 우리는 ‘전쟁이 끝났다! 전쟁이 끝났어!라고 외치며 각자 가지고 있던 무기를 쏘아대기 시작했어. 자동소총, 권총……대포……어떤 이는 눈물을 흘리고 어떤 이는 덩실덩실 춤을 췄지. ’ 나는 살아있다. 나는 살아 있다!‘ 땅바닥에 주저앉아 흙을 끌어안았다 돌을 끌어안았다 하는 사람도 있었어. 다들 기뻐 어쩔 줄을 몰랐지……나는 그냥 서 있었어. ’ 이제 전쟁은 끝났어. 하지만 우리 아버지는 돌아오지 않아, 영원히. 전쟁은 끝났어……‘


처음에 우리는 과거를 숨기며 살았어. 훈장도 내놓지 못했지. 남자들은 자랑스럽게 내놓고 다녔지만 우리는 그러지 못했어. 남자들은 전쟁에 다녀왔기 때문에 승리자요, 영웅이요, 누군가의 약혼자였지만, 우리는 다른 시선을 받아야 했지. 완전히 다른 시선……당신한테 말하는데, 우리는 승리를 빼앗겼어. 우리의 승리를 평범한 여자의 행복과 조금씩 맞바꾸며 살아야 했다고. 남자들은 승리를 우리와 나누지 않았어. 분하고 억울했지……이해할 수가 없었어……전선에서는 남자들이 우리를 존중했고 항상 보호해 줬는데. 그런데 이 평온한 세상에서는 남자들의 그런 모습을 더 이상 볼 수가 없는 거야. 퇴각하다가 땅바닥에 누워 쉴 때면 우리에게 자기들 외투를 벗어주고 본인들은 얇디얇은 군복만 입고 버티던 남자들이었는데. ’ 우리 소녀 병사들……우리 소녀병사들부터 덮어 줘야지……‘ 그러면서. 어디선가 솜이나 붕대 조각 같은 것을 구해와서 가만히 ’ 자, 받아, 필요할 거야……‘라며 건네주기도 했어. 수하리 하나라도 있으면 같이 나눠 먹었지. 전선에서 남자들은 따뜻하고 선량했어. 다른 모습은 본 적이 없어. 그런 건 아예 알지도 못했지. 그런데 전쟁이 끝나고 나서는? 차라리 아무 말 않겠어……아무 말도……무엇이 우리의 추억을 훼방 놓는 줄 알아? 그 추억들을 견딜 수가 없다는 점이야……


그러다 우리 소녀병사들에 대한 이야기가 나와서는……나는 거의 울부짖듯 소리쳤어. ‘존경하는 사령관님, 한번 말씀해 보세요. 우리 소녀병사들은 지금 거의 혼자 살아요. 결혼들을 못했죠. 다들 콤무날카에 산다고요. 그들을 안타깝게 여긴 사람이 누구라도 있나요? 보호해 준 사람은요? 전쟁이 끝나고 당신네 남자들은 다 어디로 숨어버린 거죠? 배신자들!

사령관은 용서를 구했어. ’ 빌랴, 자네에게 할 말이 없네. 그저 눈물만 흘린 뿐이야.‘ 우리는 동정이 필요한 게 아냐. 우리는 우리가 자랑스러우니까. 열 번이고 백 번이고 역사를 고쳐 쓰라고 해. 스탈린을 넣든지 빼든지 알아서 쓰라고. 하지만 이것만은 분명히 남겠지. ‘우리가 승리했다! 는 사실. 그리고 우리의 고통도. 우리가 겪은 그 아픔들도. 그건 잡동사니 쓰레기도 아니고 타다 남은 재도 아니야. 그건 바로 우리네 삶이지. “


이제 알겠다. 그들이 결국은 이야기를 시작한 이유를……


우리는 작은 메달을 받았어…


나는 사람들의 물결 속으로 들어간다. 몸이 둥실 떠오르고 흘러가고 떠밀리다 보니 어느새 낯선 세계에 와 있다. 낯선 섬나라에. 아는 사람들, 모르는 사람들 틈에서 나는 분명한 사실 하나를 깨닫는다. 내가 이 사람들을 사랑한다는 것. 이들은 대개 우리 사이에서 잊힌 존재이고 눈에 잘 띄지도 않는다. 왜냐하면 이들은 이제 이 세상을 떠날 나이가 외었고 그 수도 점점 줄어들지만 우리는 점점 더 많아지니까. 이들은 1년에 한 번씩 다 함께 만남의 자리를 갖는다. 단 한순간이라도 자신들의 그 시간으로 돌아가기 위해. 그 시간이란 바로 그들 자신의 기억이다.


나는 전쟁을 회상할 필요가 없어요. 지금도 내 모든 삶이 전쟁 중이니까……


누가 말만 해도 무슨 소리만 나도 그게 다 전쟁인 거야……전쟁……아이고, 이놈의 전쟁이 이제 노상 옆에 따라다니지 뭐야! ‘엄마’라고 하잖아? 그러면 그건 이미 그저 ‘엄마’가 아니었어. 또 ‘집’이라고 하잖아? 역시 그냥 ‘집’이 아니었지. 그 말속에 뭔가가 더 있었어. 글쎄, 더 애틋하고, 더 두려운 뭔가가 보태졌다고나 할까. 그래, 뭔가가 더 있었어……


부상병이 아직 들을 수 있는 동안은……마지막 순간까지 ‘아니에요. 괜찮아요. 당신이 죽는다니 말도 안 돼요’라고 말해줬어. 입을 맞추고 안아주며 ‘걱정 마요, 괜찮아요’라고 위로도 했지. 이미 숨을 거둬서 눈이 허공을 보는데도 나는 계속 귀에 대고 뭔가를 속삭였어……뭔가 안심시키는 말을……그 이름들은 기억에서 지워졌지만 얼굴들은 여전히 기억 속에 남아 있어……“

“우리 병실에 부상병 둘이 있었어……독일군 병사와 온몸에 화상을 입은 우리 전차병이었지. 그들을 살피러 갔어.

”좀 어때요? “ “난 좋아요. “ 우리 전차병이 대답했어.

“하지만 저 친구는 안 좋은 거 같아요. ” “저 사람은 파시스트인데……” “아니, 나는 괜찮다니까요. 저 친구가 안 좋지.”

그들인 이미 적이 아니었어. 그저 사람들, 부상당해 옆에 나란히 누운 사람들이었지. 두 사람 사이에 뭔가 인간적이 교감이 생겼던 거야. 그런 일은 자주 일어났어, 그것도 아주 빠른 시간 안에……“


“소원이 뭐였냐고? 당연히, 첫 번째는 승리였고, 두 번째는 살아남는 것이었지. 누군가는 이랬지. ‘전쟁이 끝나면 난 아이들을 여럿 낳을래.’ 또 누군 가는 이렇게 말했어. ‘난 대학에 들어갈 거야.’ 또 다른 누군가는 ‘난 아예 미용실에 죽치고 살 거야. 예쁘게 꾸미고 앉아서 내 모습만 바라볼 테야’ 라거나 ‘좋은 향수도 사고 머플러도 사고 브로치도 살 거야’하고 말했어.

하지만 막상 그 시간이 닥치자, 갑자기 모두 조용해졌지……“


“난 들꽃을 보면 전쟁이 떠올라. 전쟁 때 우리는 꽃을 꺾지 않았어. 꽃을 꺾는다면 그건 누군가의 장례를 치러주기 위해서였지……작별을 고하려고……”


그건 내가 아니었어…


올가 야코블레브나 오멜첸코, 저격중대 위생사관:

기억이야 얼마든지 할 수 있어. 끝도 없이……그런데 가장 중요한 게 뭔지 알아?

나는 전쟁의 소리를 기억해. 사방에서 으르렁, 쾅쾅, 쨍쨍 불을 뿜어 내던 그 소리들……전쟁터에서는 사람의 영혼마저 늙어버리지. 전쟁이 끝나고 나는 다시는 젊음으로 돌아갈 수 없었어……그게 제일 중요한 점이지. 내 생각엔 그래……


이미 수천 번도 넘는 전쟁이 이 땅에서 벌어졌음에도(얼마 전에 읽은 책에서 봤는데, 지구상에서 일어난 크고 작은 전쟁들을 합치면 3천 번도 넘는다고 한다), 전쟁은 여전히 인간사에서 가장 풀기 어려운 비밀 중 하나로 남았다. 언제나 그랬던 것처럼 변한 건 아무것도 없다. 나는 거대한 역사를 인간이 가닿을 수 있는 작은 역사로 만들기 위해 노력한다. 그래야 뭐라도 이해할 수 있을 테니까. 할 말을 찾을 수 있을 테니까. 하지만 탐색하기 간단해 보이는, 그리 넓지 않은 이 작은 영토-한 사람의 영혼의 공간-가 역사보다 더 난해한다. 알아내기 더 힘들다. 왜냐하면 내 앞에 있는 그건 살아 있는 눈물이고 살아 있는 감정들이기에. 대화하는 중에도 아픔과 공포의 그늘이 스멀스멀 피어나는, 살아 있는 사람의 얼굴이기에. 순간 스치는 고통의 표정 앞에서 간혹 나도 모르게 '사람은 고통이 있기에 아름다운 건 아닐까'라는 불순한 생각을 품을 때가 있다. 그러고는 나 자신에게 흠칫 놀란다......

길은 오로지 하나다. 사람을 사랑하는 것.
그리고 사랑으로 사람을 이해하는 것.


지금도 그 눈길이 잊히질 않아…


지나이다 바실리예브나:

언니도 나도 의사의 길을 포기했어요. 전쟁 전에는 의사를 꿈꿨는데 말이에요. 우리가 원하기만 하면 입학시험을 치지 않고 바로 의과대학에 입학할 수 있었어요. 우리한텐 참전용사로서의 특권이 있었거든요. 하지만 사람들이 고통 속에 몸부림치며 죽어가는 모습을 너무도 많이 봤기 때문에 더 이상은 볼 수가 없었어요. 상상만 해도 싫었어요. 그래서 이미 30년이 흐른 뒤였는데도 딸아이가 그렇게 가고 싶어 하는 의과대학을 단념시켰어요. 수십 년이 흘렀지만...... 지금도 눈을 감으면 보여요...... 어느 봄날...... 우리는 이제 막 전투가 휩쓸고 지나간 들판을 따라 걸으며 부상병들을 찾아요. 온통 짓밟힌 들판. 저만큼 전사한 병사 두 명이 보여요. 젊은 우리 병사와 역시 젊은 독일군 병사가 어린 밀밭에 하늘을 보고 누워 있죠....... 하지만 전혀 죽은 사람들 같지 않아요. 그저 누워서 하늘을 보고 있을 뿐...... 나는 지금도 그 눈길이 잊히질 않아요……


올가 바실리예브나:

전쟁이 끝나기 며칠 전 일인데, 아직도 기억에 생생해요. 말을 타고 가는데 갑자기 어디선가 음악 소리가 들리는 거예요. 바이올린 소리가...... 그리고 바로 그날이 나한테는 전쟁이 끝난 날이었어요...... 갑자기 음악 소리라, 그건 기적이었죠...... 또 다른 소리가 들려왔어요...... 마치 긴 잠에서 깨어난 것 같더군요...... 우리는 모두 전쟁만 끝나면, 그 숱한 눈물만 그치면 멋진 삶이 우리를 기다릴 거라고 믿었어요. 아름다운 인생이. 승리만 하면...... 이날들만 견뎌내면...... 모든 사람이 한없이 선해지고 서로 사랑만 할 거라고 믿었죠. 모두 형제자매가 될 거라고. 우리가 얼마나 그날을 기다려왔는지...... 그날이 오기를 간절히 기다렸어요......


우리는 쏘지 않았어…


나는 지금도 그때 꿈을 자주 꿔...... 꿈을 꾼다는 것만 알지, 꿈 내용은 잘 기억이 아질 않아. 그래도 내가 꿈속에서 그곳 어딘가에 있었고...... 그곳을 떠나왔다는 것, 그 정도는 어렴풋이 느껴져...... 꿈속에서 '삶은 시간을 필요로 하는구나'라는 생각이 아주 짧은 순간 스쳐가기도 하지. 그리고 어떤 땐 어디까지가 꿈이고 어디까지가 현실인지 모호해지기도 하고...... 내 기억엔 아마 지몹니키에서 있었던 일일 거야. 두어 시간이라도 눈 좀 붙이려고 막 누웠는데 폭격이 시작되어라고. 야, 이 새끼야! 이런 우라질...... 그런데 두 시간짜리 달콤한 꿈을 포기하느니, 차라리 나를 죽여라 싶은 거야. 바로 옆에서 포성이 크게 울렸어. 건물이 다 휘청거릴 정도였지. 하지만 나는 그대로 잠에 빠져들었어......


군인이 필요하다는 거야… 아직은 더 예쁘고 싶었는데…


전쟁터에서 여자로 사는 건 불가능하며 전쟁터는 여자에게 금기의 장소라고 말이다. 하지만 내 생각이 틀렸다...... 나는 이미 첫 만남에서부터 곧바로 알아차렸다. 여자들은 무슨 말을 해도, 심지어 죽음을 언급할 때조차도 아름다움에 대한 이야기는 결코 빠뜨리는 법이 없다는 것을(정말이다). 아름다움은 여자를 여자로서 존재하게 하는 이유였다.


그들은 놀랍게도(40년이란 세월이 흘렀음에도) 전쟁의 일상에서 일어난 사소한 일들까지 모두 기억하고 있었다. 소소한 사건들과 그때의 느낌, 색채, 소리 들까지. 그네들의 세계에서는 일상과 존재가 하나였고, 따라서 존재의 흐름은 그 자체로 가치가 있었다. 그들에게는 전쟁도 평범한 삶의 한때일 뿐이었다. 그네들의 이야기 속에서 나는 사소한 것이 위대한 것을 압도하는 순간을 여러 번 목도했다.


수많은 시간의 곁을 지나오면서 어떤 일들은 갑자기 커졌고 어떤 일들은 작아졌다. 인간적이고 내밀한 일들은 커졌다. 그리고 그게 나에게는 재미있게도 그네들 자신에게도, 더 친근하고 가깝게 다가왔다. 인간적인 것이 비인간적인 것을 이겼다. 단지 인간적이라는 이유 하나만으로. “내가 울더라도 걱정하지 마. 불쌍해하지도 말고, 내가 마음이 아프면 아픈 대로 내버려 둬. 하지만 당신이 고마워. 내 젊은 시절을 떠올리게 해 줘서......”

K.C. 치호노비치, 중사, 고사포 병사


그건 나도 몰랐던 전쟁이었다. 그런 전쟁은 상상조차 하지 못했다......


“내가 정말 적절한 단어를 찾을 수 있을까? 어떻게 총을 쏘았는지는 이야기할 수 있어. 하지만 어떻게 울었는지는 말 못 하겠어. 그건 아마 못다 한 이야기로 남을 것 같아. 한 가지는 분명히 알아. 사람은 전쟁터에서는 무시무시하고 이해할 수 없는 존재가 된다는 것을. 그런 사람을 어떻게 이해하지?

당신은 작가잖아. 직접 한번 생각해 봐. 뭔가 아름다운 말. 들끓는 이도 더러운 진흙탕도 없고 구토물도 없는...... 보드카 냄새도 피냄새도 없는 그런 말을...... 우리 삶처럼 끔찍한 그런 거 말고...... “

아나스타시야 이바노브나 메드베드키나, 사병, 기관총 사수


"문득 음악 소리가 들리면...... 아니면 노랫소리...... 여자 목소리도...... 그러면 그때 그 느낌이 되살아나. 그때랑 비슷한 뭔가가 느껴져......

전쟁영화를 봐도 사실이 아니고 책을 읽어도 사실이 아닌 거야. 그러니까, 그게 달라...... 뭔가가 달라. 그렇다고 전쟁을 직접 겪은 내가 이야기하면 정확하냐. 그것도 아니거든. 전쟁은 그렇게 끔찍하지도 그렇게 아름답지도 않았어. 때론 전쟁터에서 맞는 아침이 얼마나 아름다운지 알아? 전투가 있는 날 아침이면...... 주위를 보며 생각했지. '어쩌면 아침을 맞는 것도 오늘이 마지막일지 몰라. 아, 세상은 이렇게도 아름다운데...... 공기도...... 햇살도......'"

올가 니키티치나 자벨리나, 군의관 외과의


아가씨들! 공병대 지휘관은 오래 살아야 두 달이라는 거, 알고나 있소…


만남을 끝내고 돌아오는 길에 가끔, 고통은 고독이라는 생각을 한다. 완전한 고립. 한편으로 고통은 앎의 특별한 형태는 아닐까라는 생각도 든다. 인간의 삶에는, 특히나 우리네 삶에는 고통 외의 다른 방법으로는 도저히 전달할 수도 지켜낼 수도 없는 뭔가가 있다. 그건 이 세상이 그렇게 생겨먹었고, 또 우리가 그렇게 생겨먹었기 때문이다.


전쟁이 끝났지만 우리는 꼬박 1년을 더 들판이고 호수고 작은 강 들이고 다 뒤지고 다니며 지뢰를 제거해야 했지. 전쟁 중에는 뭐든 물속에 던져버리니까. 중요한 건, 무사히 통과해서 제때 목표물에 닿는 것이었어. 하지만 이젠 다른 걸 생각할 때였지...... 앞으로의 삶에 대해서...... 공병들의 전쟁은 실제 전쟁이 끝나고도 몇 년이 더 지나서야 정말로 끝이 났어. 공병들이 다른 누구보다 오랜 전쟁을 치른 거지. 이미 승리한 마당에 폭발을 기다리는 게 말이 돼? 폭발의 순간을 기다린다...... 정말 말도 안 되는 일이었지! 승리 후의 죽음이야말로 가장 끔찍한 죽음이야. 두 배나 더 무섭고 끔찍한 죽음.

앞폴리나 니코노브나 리츠케비치-바이라크, 소위, 공병지뢰소대 지휘관


한 번만 볼 수 있다면…


"날마다...... 눈앞에서 보면서도...... 받아들일 수가 없었어. 젊고 잘생긴 남자가 죽어간다는 현실을...... 죽어가는 이에게...... 입맞춤을 해주고 싶었지. 죽어가는 이를 위해 의사로서 아무것도 해줄 게 없다면 여자로서라도 뭔가 해주고 싶었어. 웃어주고, 머리를 쓰다듬어주고, 손이라도 잡아주고 싶었어...... 전쟁이 끝나고 숱한 해가 지났을 땐데 어떤 남자가 나한테 당신의 환한 미소를 기억하고 있다고 고백하더군. 나야 당연히 그 사람이 기억나지 않았지. 수많은 부상병들 중 한 명이었으니까. 그런데 그 사람은 나한테 그러는 거야. 내 미소가 자기를 이른바 저세상에서 이 세강의 삶으로 돌아오게 했다고...... 여인의 미소가......"베라 블라디미로브나 셰발디셰바, 대위, 외과의


"날마다...... 눈앞에서 보면서도...... 받아들일 수가 없었어. 젊고 잘생긴 남자가 죽어간다는 현실을...... 죽어가는 이에게...... 입맞춤을 해주고 싶었지. 죽어가는 이를 위해 의사로서 아무것도 해줄 게 없다면 여자로서라도 뭔가 해주고 싶었어. 웃어주고, 머리를 쓰다듬어주고, 손이라도 잡아주고 싶었어......

전쟁이 끝나고 숱한 해가 지났을 땐데 어떤 남자가 나한테 당신의 환한 미소를 기억하고 있다고 고백하더군. 나야 당연히 그 사람이 기억나지 않았지. 수많은 부상병들 중 한 명이었으니까. 그런데 그 사람은 나한테 그러는 거야. 내 미소가 자기를 이른바 저세상에서 이 세강의 삶으로 돌아오게 했다고...... 여인의 미소가......"

베라 블라디미로브나 셰발디셰바, 대위, 외과의


씨감자에 대하여...


아, 지금도 그 이야기를 하면, 목이 메어와. 어떻게 그런 사람들이 있을까! 어떻게 그런 사람들이! 남편은 전쟁에 나갔다 죽고 혼자서 셋이나 되는 아이들을 키우고 있으면서, 게다가 가진 거라곤 그 닭 한 마리가 전부인데. 그런데 그 닭을 팔겠다는 거야. 나한테 돈을 주려고 말이야. 그 당시 기부금은 전부 현금으로만 받았거든. 여자는 모든 걸 내놓을 각오가 돼 있었어. 그래서 세상이 평화로울 수만 있다면, 자기 아이들이 무사히 자랄 수만 있다면. 여자의 얼굴을 기억해. 세 아이들 얼굴도......

그 아이들은 어떻게 자랐을까? 소식을 알면...... 찾아가서 만나고 싶어......"

클라라 바실리예브나 곤차로바, 고사포 병사


엄마,‘아빠’가 뭐예요?


어느 날 아들이 밖에서 친구들과 놀다가 저녁에 집에 와서 물었어.

"엄마, '아빠'가 뭐예요?"

아들에게 설명해 줬지.

"네 아빠는 얼굴이 하얗고 잘생긴 분이야. 지금 군대에서 적을 물리치고 계셔."

아군이 민스크를 탈환하자 맨 먼저 전차부대가 시내로 들어왔어. 그런데 우리 아들이 울면서 집으로 뛰어들어오는 거야.

"우리 아빠는 없어요! 전부 까만 사람들만 있고 하얀 사람은 없어요......"

그때가 7월이었고, 전차병들은 어린 청년들인 데다 모두 햇빛에 까맣게 그을려 있었지.

남편은 전쟁터에서 불구가 되어 돌아왔어. 젊은 모습은 온데간데없고 웬 늙은이가 온 거야. 그때부터 불행이 시작됐어. 아들은 당연히 얼굴이 하얗고 잘생긴 아빠를 기다리고 있는데, 병들고 늙은 남자가 아빠라고 나타났으니 어땠겠어. 아들은 한참이 지나도 남편을 제 아빠로 인정하지 않았어. 어떻게 불러야 할지 난감해했지. 내가 중간에서 두 사람이 친해지도록 중재를 했어.

나테즈다 비켄티예브나 하트첸코, 지하공작원


그리고 그녀는 심장이 있는 곳에 손을 갖다 댔어…


어느 날 친구와 함께 자전거를 타고 있었어. 보니까, 맞은편에서 독일 여자가 아이들을 데리고 걸어오더라고. 아이가, 아마 셋이었을 거야. 두 아이는 유모차에 타고, 한 아이는 엄마 치맛자락을 잡고 옆에서 걷고. 그런데 여자가 우리를 보고는 소스라치게 놀라는 거야. 우리가 옆을 지나가자 다짜고짜 땅바닥에 무릎까지 꿇고 절을 하더라니까. 이렇게...... 머리가 땅에 닿도록...... 그리고 우리한테 뭐라고 하는데, 이거야 원, 알아들을 수가 있나. 그러자 여자가 자기 손을 심장이 있는 곳에 갔다 대더니 이어서 아이들을 가리켰어. 우리는 여자가 하고 싶은 말이 뭔지 이해했지. 여자는 울면서 연신 절을 했어. 자기 아이들을 살려줘서 고맙다면서......

그 여자도 누군가의 아내였겠지. 여자의 남편은 아마 동부전선에서 싸웠을 거야...... 러시아에서......

아나스타시야 바실리예브나 보로파예바, 상등병, 탐조등 담당병사


나는 생각했어. '독일 땅에 들어서면 내가 어떻게 나올까? 우리 병사들은?' 우린 놈들이 한 짓을 모두 기억하고 있었으니까...... 끓어오르는 증오심을 어떻게 참아낼 수 있을까? 그 분노를 다스리려면 얼마만큼의 자제력이 필요한 걸까? 한 마을에 도착했어. 아이들이 나와 노는데. 많이 굶은 것 같고 딱해 보이더라고. 아이들이 우리를 무서워하면서...... 슬금슬금 숨더군...... 그런데 내가. 놈들을 그토록 증오하던 내가...... 어떻게 한 줄 알아? 독일 아이들에게 먹을 걸 나눠준 거야. 그것도 우리 병사들한테 부탁까지 해가며. 전투식량 남은 거고 설탕 조각이고 다 모아서 아이들에게 줬다니까. 당연히 놈들이 한 짓을 잊은 건 아이었지...... 오히려 낱낱이 기억하고 있었는걸. 하지만 굶주린 아이들의 눈을 태연히 보고만 있을 수는 없더라고.

소피아 아다모브나 쿤체비치. 위생병


전쟁 중에는 깊은 생각을 해본 적이 없었어. 그런데 이제 생각을 해야 했지. 머리를 써야 했어...... 밤마다 모든 게 되풀이되고 또 되풀이되는데...... 나는 아예 잠을 안 자고 버텼어...... 의사들이 학업을 중단하라고 경고하더군. 하지만 같은 방 기숙사 친구들이 의사의 말은 신경 쓰지 말라며 자기들이 도와주겠다고 나섰어. 매일 저녁 친구들이 돌아가며 나를 극장에 데려가서 코미디영화를 보여줬지. '너는 웃는 법을 배워야 해. 많이 많이 웃어야 한다고.'

내가 싫어하든 좋아하든 무조건 나를 끌고 갔어. 코미디영화는 그리 많지가 않아서 한 영화마다 100번씩은 봤을 거야. 그래, 최소한 100번씩은 봤지. 처음엔 울다 웃다 했어......

하지만 악몽은 사라지더라고, 그래서 공부를 계속할 수 있었지......

타마라 우스티노브나 보로베이코바, 지하공작원


진지하게 묻는데...... 이게 다 역사를 위한 거지? 당신이 지금 이 대화를 녹음하는 거...... 이 대화가 역사를 위한 거라면, 그렇다면...... 이렇게 말하고 싶어. '만약 여자로 살지 않았다면 전쟁터에서 살아남지 못했을 거다'라고. 나는 한 번도 남자가 부러운 적이 없었더. 어렸을 때도 젊었을 때도. 전쟁터에서도. 나는 언제나 내가 여자라서 행복했어. 사람들은 기관단총, 권총 같은 무리가 아름답다느니 무기 안에 인간의 사유와 욕망이 담겨 있다느니 하지만 나는 무기가 아름답게 느껴진 적이 단 한 번도 없었어. 보니까, 남자들은 성능 좋은 권총 앞에서 넋을 잃더라고. 나는 그게 정말 이해가 안 됐지. 나는 여자니까.

엘레나 보리소브나 즈바긴체바, 사병, 무기제조병사


갑자기 미치도록 살고 싶어 졌어…


타마라 스테파노브나 음냐기나, 근위대 하사, 위생사관:


전쟁만으로도 우리는 충분히 힘들었어. 그런데 전행 후에도 고통을 겪어야 했지. 또 한 번의 전쟁을 치러야 했으니까. 앞선 전쟁만큼이나 끔찍한 또 한 번의 전쟁. 무슨 이유인지 남자들은 우리를 저버렸어. 모른 체했지. 전쟁터에서는 그렇지 않았는데. 기어가는데 포탄 파편이나 총알이 날아오잖아……그러면 남자병사들이 보호해 줬어……어느 병사가 됐든 ‘엎으려요, 자매!’라고 소리치며 달려들어 자기 몸으로 우리를 감쌌지. 총알은 이미 그 병사에게 박히고……병사는 죽거나 부상을 당했어. 그렇게 나는 세 번이나 목숨을 건졌지.


이야기의 운을 떼기만 해도 벌써 고통이 느껴져. 이야기를 하면서도 다시 가슴이 먹먹해지고 온몸이 벌벌 떨려. 모든 게 생생하게 떠올라서. 죽어 엎드러진 우리 병사들 모습, 외치다 외치지 못한 사연이 있는 듯 벌어진 입술, 쏟아져 나온 창자들, 아마 땔감보다 우리 병사들 주검을 더 많이 봤을걸……아, 얼마나 끔찍했던지! 백병전은 정말 무시무시했어. 총검을 앞세우고 사람이 사람을 향해 돌진하는데……시퍼런 총검을 빼들고서. 그걸 보고 나면 말을 더듬게 되고 며칠은 제대로 말을 할 수가 없어. 한동안 입을 닫게 되지. 직접 겪어보지 않은 사람이 과연 이해할 수 있을까? 어떻게 이야기해야 해? 어떤 표정으로? 자, 이제 당신이 대답해 봐. 대체 어떤 얼굴로 그 일을 회상해야 하는지. 다른 사람들은 어떻게든 할 수 있을지 몰라도……그럴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나는 아니야. 눈물부터 쏟아져. 하지만 반드시, 꼭 이야기해야 해. 우리가 겪은 일이 헛되이 사라지면 안 되니까. 사람들에게 알려야 하니까. 이 세상 어딘가에 우리의 비명소리가 남아 있어야 하니까. 우리의 그 피맺힌 통곡이……

전쟁터에서 무슨 생각을 했는지 알아, 우리가? 우리는 그랬어. ‘아, 끝까지 살아남기만 한다면……전쟁이 끝나면 사람들은 얼마나 행복해할까! ‘아, 얼마나 멋지고 아름다운 인생이 펼쳐질까! 이처럼 처절한 고통을 이겨냈으니 이제 사람들도 서로 가엾게 여기겠지. 서로 사랑할 거야, 달라질 거야.’ 정말 그렇게 생각했다니까. 철석같이 믿었지.

하지만 사람들은 여전히 서로 미워해. 다시 서로를 죽이고, 나는 그게 제일 이해가 안 돼……어떻게 그럴 수가 있지? 우리는……우리는 도저히 그게……


전쟁처럼 악하고 소름 끼치는 일은 이 세상 어디에도 없다.
-톨스토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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