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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노이 Oct 27. 2022

8.1 체육 교사의 꿈을 꾸다

  나는 경상남도 통영시에 위치한 작은 섬에서 태어나 초등학교 6학년을 졸업할 때까지 살았었다. 내가 초등학교 6학년일 때 전교생은 확실하지는 않지만 15명 정도였던 거 같다. 학생 수가 너무 적어서 두 개의 학년이 한 교실에서 한 선생님에게 수업을 들었었다. 교실은 아늑하고 따뜻했으며, 선생님은 나의 말을 귀담아 들어주셨으며, 나의 학습 수준에 맞춰 수업을 해 주셨다. 통영 시내에서 섬으로 등교를 할 때면 선생님께서 집 앞으로 차로 데리러 오셨으며, 하교할 때도 집 앞까지 차로 데려다주셨다. 가끔 선생님께서 휴일에 당직을 서시면 학교에 놀러를 갔었다. 그럴 때면 맛있는 과자를 내어 주셨으며, 함께 놀이를 해 주셨다. 이때를 떠 올려보면 학교는 집처럼 안전하고 편안했고, 선생님은 부모님처럼 친절하고 따뜻했으며, 나는 행복함을 느끼며 초등학교 시절을 보냈던 거 같다.  


  나의 중학교 시절은 평범하지 않았다. 섬에서 도시로 유학을 온 나는 친구가 단 한 명도 없었다. 그래서 친구를 사귀는 것부터가 나에게는 큰 어려움이었다. 그러나 어렸을 때부터 키가 컸고, 운동을 잘해서 금방 친구들과 친해졌다. 나에게는 엄청 소중한 친구들이었기에 이 친구들과는 의리로 똘똘 뭉쳐 다녔다. 청소년으로서 하지 말아야 할 행동들도 많이 했으며, 수업시간에는 선생님들께 예의 없는 행동들도 서슴지 않고 했었다. 다시 생각해봐도 철없던 시절이었다.


  중학교 2학년 때, 음악 교생 선생님께서 오셨다. 학생들의 관심은 그 선생님께 가 있었다. 그러나 선생님에 대한 학생들의 애정 표현은 거칠었다. 수업시간에는 떠들고, 피아노를 치고 계시는 선생님을 보고 피아노 뚜껑을 몰래 닫아버리고, 몰래 뒤에서 선생님 머리카락을 뽑고 도망치는 학생들이 있었다. 학생들의 애정 표현에 당황해하시는 선생님이 너무나 안쓰럽게 보이기도 했다. 나는 선생님께 잘 보이고 싶었다. 그래서 음악 선생님 수업시간에 떠드는 친구들, 선생님을 괴롭히는 친구들에게 강력한 레이저를 쏘았다. 그때 나에게 덤빌 수 있는 친구들은 없었다. 이렇게 음악 교생 선생님과 인연이 되었고, 나의 삶도 조금씩 변화되고 있었다. 학교에서 나에게 관심을 가져주는 선생님은 거의 없었다. 나에게도 선생님이라는 존재는 있으나 마나 하는 존재였다. 그러나 음악 교생 선생님은 달랐다. 내가 보호해 주고 싶은 선생님이었고 나에게 희망을 주신 선생님이었다. 나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여 주셨고, 내가 가장 힘들 때 나를 안아주셨던 분이셨다. 누군가에게 안길 수 있다는 거, 누군가에게 나의 고민을 이야기할 수 있다는 것이 너무나 행복했다. 희망이 보이지 않는 삶에서 벗어나고 싶었다. 나도 누군가에게 희망을 주는 사람이 되고 싶었다. 그래서 내가 가장 잘할 수 있고, 가장 즐겁게 할 수 있고, 가장 잘 알고 있는 체육 교사를 꿈꾸게 되었다. 


  교사가 되는 과정은 쉽지 않았다. 일단 중학교에서 고등학교로 진학하는 것이 가장 큰 문제였다. 학력고사를 치러서 성적순으로 고등학교를 지원할 수 있었다. 그 당시 나는 인문계 고등학교에 진학할 수 있는 성적이 되지 않았었다. 만약 인문계 고등학교에 진학을 못 한다면 체육교사가 되는 것은 힘들어 보였다. 왜냐하면 주변의 고등학교는 내가 보았을 때 완전 꼴통학교였기 때문이었다. 밤을 새워 수학 공부를 해도, 시험 점수는 45/100점이었다. 나는 공부라는 것을 해 본 적이 없었다. 시험 문제를 읽고 나면 무엇을 묻는지 몰랐다. 수업시간에는 선생님의 설명을 이해하지 못하니 졸리기만 했고, 성적은 오르지 않았고, 친구들과는 거리가 멀어지는 거 같아 불안하기만 했다. 그래도 나에게는 나를 믿어주고, 응원해주고, 꿈을 지지해 주시는 음악 선생님이 계셨다. 그렇기에 체육교사가 되어야만 했다.


  마지막 합격문을 닫고 내가 원하던 인문계 고등학교에 진학하였다. 수업 시간에 열심히 듣고, 복습을 하더라도 성적은 오르지 않았다. 분명히 수업 내용을 이해하고, 암기를 했는데 시험 시간에는 헷갈렸다. 그때를 떠 올려보면 난 공부를 한 것이 아니라 그냥 책을 보고 있었고, 어렴풋이 알고 있는 것을 알고 있다고 착각하고 있었다. 고등학교에서 카리스마 쪄는 물리 선생님을 만났다. 선생님께서는 나에게 “누가 치즈를 옮겼을까?”라는 책을 선물로 주셨다. 내 인생 처음으로 첫 페이지부터 마지막 페이지까지 읽어본 책이다. 현실에 만족하지 않고 변화에 민감하게 대처하고, 불안함을 떨쳐내고 새로운 세계를 향해 나아가는 생쥐들의 모습을 보며 포기하지 않는다면 꿈을 이룰 수 있을 것만 같았다. 내가 잘할 수 있는 것은 힘듦을 참아낼 수 있는 인내심과 목표한 것을 이룰 때까지 포기하지 않는 끈기였다. 고3 생활은 너무나 힘들었다. 아무리 공부를 해도 목표한 성적에는 도달하지 못하여 심리적으로 불안했고, 체대 입시 실기를 위해 저녁에는 운동을 해야 해서 체력적으로도 힘들었다. 나의 꿈을 이루기 위한 두 번째 관문인 체육교육과에 진학하는 것은 어렵게만 느껴졌다. 체육교사라는 꿈을 포기하고 싶었다. 그러나 내가 꿈을 포기하려고 할 때마다 물리 선생님께서는 맛있는 밥을 사주시며 나의 고민을 들어주셨으며, 따뜻한 메시지와 진심 어린 충고도 아끼지 않으셨으며, 방과 후에는 물리 공부도 가르쳐주셨다. 내가 포기하고 싶었을 때, 나에게 희망의 손을 내밀어 주신 물리 선생님 덕분으로 수능시험에서 만족한 점수를 받았다. 결국 내가 목표했던 체육교육과에 진학하게 되었다.


  대학교 수업은 너무 즐거웠다. 이론수업 시간에는 교수님의 설명이 귀에 쏙쏙 들어왔고, 실기수업  시간에는 다양한 신체활동을 직접 경험하고, 운동 방법에 대해 배울 수 있었으며, 노력한 만큼 실력이 향상되는 것이 느껴져서 좋았다. 무엇보다 체육 교사라는 꿈에 한 걸음씩 다가가고 있다는 생각에 행복했다. 그래서인지 대학교 생활은 너무 즐거웠고, 학점 또한 좋았다. 그러나 대학교 3학년 2학기가 되니, 이제 조금씩 불안해졌다. 대학교를 졸업하자마자 임용고시에 합격하는 선배들이 거의 없었다. 그리고 재수와 삼수를 거듭하여 임용고시를 준비하고, 중간에 임용고시를 포기하는 선배들도 있었다. 나의 동기들도 일찌감치 임용고시를 포기하고 다른 직업을 찾아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방황하던 중학교 시절에서 희망을 찾고, 절망감에 빠졌던 고등학교 시절을 극복하였기에, 마지막 관문이 임용고시의 거대한 산도 넘을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대학교 4학년 수업을 들으며, 2009년 첫 번째 임용고시를 치렀다. 첫 시험임에도 불구하고 1차 시험 합격 커트라인에 근접하여 2차 시험을 준비했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1차 합격 커트라인을 넘지 못했지만, 임용고시에 합격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갖게 되었다. 2010년에는 누구나 그렇듯 인생의 모든 것을 걸고 임용고시에만 몰입했고, 합격할 준비가 되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2010년 임용고시에서는 1차 합격 커트라인에 근접하지도 못했다. 나는 임용고시를 너무 쉽게 생각했고, 자만심에 빠져 있었다. 2~3개월의 휴식기를 갖고, 세 번째 임용고시에 도전했다. 이번에는 꼭 합격해야 한다는 생각에 부담감이 느껴졌고, 또 합격하지 못하면 어떡하지라는 걱정에 임용고시를 치는 것이 두려웠다. 마지막 임용고시라고 생각하고 신중하게 답안을 작성해 나갔다. 그러나 세 번째 임용고시 합격자 명단에서 나의 이름을 찾을 수 없었다. 이 때는 정말 체육 교사라는 꿈에 대해 의심이 들었다. 체육 교사라는 꿈은 이룰 수 없는 허황된 꿈 같았다. 나의 운명은 체육교사가 될 운명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노력은 절대로 자신을 배신하지 않는다.”라는 명언이 틀렸다고 생각했다. 나는 누구보다 많은 노력을 했고, 합격할 자격을 갖추었다고 생각했다. 노력은 나를 배신했다!! 어떻게 해야 할지 몰랐다. 지푸라기라도 잡고 싶었다. 어떤 일이라도 싶었다. 단지 여기에서 임용고시에서 벗어나고 싶었다. 


  인터넷을 통해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찾다가 우연히 지마켓에서 후원하고 코피온에서 주관하는 해외봉사단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러나 합격 경쟁률이 무려 200대 1이었다. 절박했다. 살려면 무엇이든 해야만 했다. 그래서 절박한 마음으로 지원서를 작성했고, 면접을 봤다. 결과는 200대 1의 경쟁률을 뚫고 최종 합격을 하였다. 임용고시 3번의 불합격 통보 이후에 받은 합격 통보라서 너무나 기뻤으며 자신감을 갖게 되었다. 


  나는 네팔 까브레 마을에서 10박 12일 동안 교육봉사활동을 할 수 있었다. 초등학생들과 함께 축구, 바람개비 만들기, 연 날리기, 무스토이 만들기 등 다양한 활동을 하면서 다시 희망이 찾았다. 처음에는 까브레 마을 학생들에게 도움을 주고, 지식을 가르치고, 배움의 즐거움을 느끼게 해 주러 왔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날수록 나의 생각은 틀렸다는 것을 깨달았다. 나의 말에 집중하고, 작은 몸짓 하나에 해맑게 웃어주는 학생들로 인해 행복함을 느끼고, 자신감이 향상되고, 희망을 찾게 되었다. 교육은 교사가 학생에게 주는 것이 아니라 교사와 학생이 서로 주고받는 것임을 이때 깨달았다. 중학교 때부터 꿈꿨던 체육 교사가 되고 싶었다. 체육교사가 되어 사람이 사는 세상을 만들고 싶다는 꿈을 이루고 싶었다. 가진 것이 많아야 행복한 세상이 아니라 너와 내가 진정으로 만나고, 서로가 서로에게 웃음과 행복을 주는 세상을 만들고 싶었다. 국공립학교 교사가 아니어도 괜찮다고 생각했다. 내가 가장 힘든 시기에 나를 일으켜 세워주셨던 선생님들처럼 나도 누군가에게 위로를, 희망을, 꿈을 심어주고 싶었다. 한국으로 돌아와 그동안 임용고시를 준비하면서 정리했던 노트와 책들, 그리고 자만심, 부담감, 두려움을 모두 휴지통에 던져버렸다. 처음 시작하는 마음으로, 나의 꿈을 이루겠다는 절박한 마음으로 임용고시를 한 번 더 준비해 보기로 했다.


  2012년에 네 번째 임용고시를 치렀다. 지역은 전라남도 도서지역이었다. 이 지역을 선택한 이유는 나의 따뜻했던 초등학교 시절과 소중한 것을 깨닫게 해 준 네팔 까브레 마을 학생들이 생각났기 때문이다. 임용고시 결과는 최종 합격이었다. 최종 합격 통보를 받고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임용고시에 합격을 한다고 해서 나의 꿈이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라는 것을 알았다. 체육교사가 되기 위한 또 다른 관문을 넘었다고 생각했다. 이제부터 진정한 체육 교사가 되어야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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