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일한 건 티 내야 할까 7
그렇다면 정치적인 인간의 세계에서 살아남지 못하는 것들은 영영 사라지고 마는 것일까? 드러내지 않아 사라지는 일들, 일꾼이 해낸 말 없는 일들은 어디로 갈까?
세상에는 히키코모리처럼 드러나지 않지만 분명 있는 것들이 있다. 아무도 말하지 않지만 우리 중 누군가는 반드시 하고 있는 것, 말 없는 일들. 대소변, 성교, 도살, 범죄이다. 인간들 틈에 끼어 있을 때에는 입에 올리지 않지만 홀로 있거나 단둘이 있을 때에만 비로소 털어놓게 되는 그것. 일꾼들의 말 없는 일은 그것들과 같은 곳으로 간다. 그곳은 비밀의 영역, 깊은 곳, 심연이다.
심연에 있던 것들이 세상 밖으로 나오면, 인간은 수치심을 느낀다. 꺼낸 사람이나 그것을 본 사람이나 이러면 안 될 것 같다는 느낌을 느낀다. 드러내서는 안 될 것을 드러냈다는 느낌, 보아서는 안 될 것을 보았다는 느낌, 이 두 가지는 모종의 불법성이다. 사람이라면 무릇 따라야 할 법칙이 있는데, 지금 이 행위는 그 법칙에 어긋났다는 느낌. 그 법칙과 느낌 모두 순전히 믿음의 영역 안에 있다. 자연법, 윤리, 예절, 교양이라고도 일컫는 그 법칙은 머나먼 선조부터 대대로 내려온 믿음에 기초한다. 그 법칙은 어디에도 명시되지 않아 실체를 찾을 수 없다. 법령에 기록되더라도 명시된 조항은 그 법칙의 극히 일부분이어서 실체 없는 그 법칙은 여전히 기능한다. 신뢰할 만한 사람에게만 드러낸다. 그래서 심연 속의 부끄러운 것들은 공공연하게 드러나지 않고 소문으로만 전해진다. 서로가 믿을 만한 사람이라고 여길 때에만 드러내기 때문이다.
먼저 대소변부터 보자. 어린아이들은 하나같이 똥오줌 이야기를 좋아한다. 아이들이 자라 기저귀를 벗고 화장실에서 대소변을 가릴 줄 알게 되면 그것을 드러내 놓고 하면 안 된다는 사실을 깨우친다. 아이에게 대소변은 부모에게만 보일 수 있는 가장 부끄러운 것이다. 배변활동은 아이가 심연의 영역에 놓는 첫 번째 현상이 된다.
그런데 또래 아이든 부모 아닌 어른이든 누군가 대소변 이야기를 꺼내면 아주 당혹스러워진다. 아이에게는 드러낼 것과 감출 것을 구분한 경험이 적다. 심연에 있어야 할 것들을 타인과 함께 공공연히 마주함에 따라 당혹감이 느껴진다. 그러나 그 당혹감은 불쾌함이라기보다 우스움으로 나타난다. 아이에게는 사실 부모와 반복하는 일상 이외의 모든 현상이 당혹스럽게 느껴지기 때문이다. 세계를 탐구하는 아이에게는 당혹감을 호기심으로 승화시키는 능력이 있다. 아이가 자신의 입으로 대소변 말하기를 꺼리면서도 어른의 대소변 농담을 즐기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기초교육을 받는 소아에게는 대소변이 꽤나 큰 문제가 된다. 부모에게 생존을 의탁하며 부모의 세계만을 물려받던 유아 시기가 지나 또래 친구와 선생님의 입을 통해 타인의 세계를 접하는 소아 시기가 오면, 감추어야 할 대소변과 농담으로서 대소변의 차이는 아주 극명해진다. 자신의 대소변은 철저히 가리면서도 타인의 대소변을 유희 거리로 삼는 데 주저하지 않는다. 반면 선생님에게는 아이의 대소변이 대수롭지 않다. 그들은 유아기의 장기가 성인과 얼마나 다른지를 알기 때문이다. 사실 유아와 성인의 해부학적 차이는 크게 중요하지 않다. 성인의 대소변이 주는 절박감과 아이의 대소변이 주는 절박감이 양적으로 얼마나 다른지는 확인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성인은 대소변의 절박감이 마치 죽음과 같이 자신에게도 닥칠 수 있는 보편적 우연성의 문제라는 사실을 안다. 그래서 아이의 대소변은 성인의 대소변과 절박감의 측면에서 아주 다르다고 믿는 것이다. 소아의 해부학적 특이점은 단지 그 이유로 기능할 뿐이다. 그렇게 말해야 모두가 고개를 끄덕일 것이기 때문이다.
대소변을 대하는 소아와 성인의 태도 차이로 인해 아이는 공공장소에서 배변활동을 기피하는 행동까지 보이기도 한다. 이 문제는 물리적 현상이 아니라 인간적 현상이다. 성인은 회의실과 화장실을 구분할 줄 안다. 몇 초 전까지 회의실에서 마주 앉아 이야기를 나누던 사람이 대변보는 소리를 화장실 칸막이 너머에서 듣더라도, 성인은 그 사건을 공공연한 우스갯소리로 소비하지 않는다. 몇몇 지인 사이에서 내집단의 연대를 강화하기 위한 소문으로 삼을지언정. 그러나 소아는 그렇지 않다. 타인의 절박함을 농담으로 삼기를 서슴지 않는다. 언제 누구에게 웃음거리가 될지 모른다. 그 불안이 생존에 관계된 행동을 기피하도록 만든다. 수치심이 고통을 앞선다. 인간이 그저 동물이기 이전에 정치적 동물이기 때문에 그러하다. 인간은 타인의 절박함을 숨겨줄 때 신뢰를 얻고, 신뢰를 얻을 때에만 인간의 세계, 공동체를 형성할 수 있다.
다음으로 성교를 보자. 모든 인간은 성교의 산물이다. 그러나 전통적으로 성행위는 숨겨야 할 현상이었다. 지금도 그 전통은 크게 바뀌지 않아서 우리는 성교를 숨기거나 에둘러 말한다. 성교 그 자체뿐만 아니라 성교를 연상시키는 모든 것이 비밀의 영역에 놓인다. 길을 걸으면 그 무엇도 성교와 연관되지 않으려 노력한다. 공개된 장소에서는 모두가 몸을 가린다. 신체로 둘러싸인 타인의 마음속은 심연이다. 타인이 나의 신체를 어떻게 해석할지 아무도 알 수 없다. 아무리 몸을 가렸을지라도 타인이 나의 신체에서 성교를 떠올릴지 알 수 없는 노릇이다.
인간은 타인의 해석을 방지하거나 제한할 수 없다. 바로 그것 때문에 인간은 옷을 입는다. 예외는 얼굴과 손이다. 현대 서구 문명이 도래한 이후로 얼굴과 손은 언제나 드러내면서도 우리의 몸은 언제나 옷에 싸여있다. 유럽의 귀족은 장갑을 껴 손을 감추는 걸 예의로 여기기도 한다. 심지어는 문화권에 따라 눈만 빼고 모든 곳을 가리는 곳도 있다. 흔히 시간, 장소, 사건이라 부르는 상황에 따라 팔과 다리, 그리고 아주 가끔씩 배와 허리를 드러낼 때가 있기도 하다. 그러나 적절하지 않은 상황에 드러난 맨살을 보면 우리는 당혹감을 느낀다. 그 당혹감은 공공연히 드러난 성행위를 목격할 때 느끼는 당혹감과 같다. 공공장소에 놓인 대소변이나 타인의 배변활동을 마주하는 것과 크게 다르지 않다. 이 말은 성행위가 대소변과 본질적으로 비슷한 짓이라는 뜻이 아니다. 인간이 성행위와 대소변을 감춰야 할 것으로 동일하게 여긴다는 뜻이다.
누가 누구와 잤다는 말만큼 내집단을 공고히 하는 말이 있을까? 그 말은 유아기의 대소변만큼이나 당혹스럽고 은밀하며 흥미로운 말이다. 언론에서 연예인의 연애나 정치인의 불륜설을 심심찮게 터뜨리는 걸 보면, 심연의 것들을 공공연하게 드러내는 일은 소아기에나 성인기에나 한결같이 유효하다. 성욕은 배변욕구와는 다른 차원의 절박감을 불러일으키겠으나, 타인이 그 절박감을 이용해 명성을 얻으려 할 때, 공동체적 신뢰가 소모된다는 점에서는 크게 다르지 않다. 누가 화장실에서 똥 싸고 있다는 아이들의 보고와 누가 누구와 잤다는 뜬소문, 가십, 언론보도는 공동체에서 정확히 동일한 기능을 수행한다.
다음으로 도살을 보자. 인간적인 음식은 조리된 음식이다. 이때 조리는 불로 가열하는 등의 행동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식재료에서 살아있을 때의 모습을 효과적으로 지우는 모든 행위가 곧 조리다. 식재료의 이미지에서 생존본능, 운동, 호흡, 신체의 이미지를 떠올리는 순간, 그것으로 만들어진 음식은 음식으로만 해석되지 않는다. 도살은 생물을 식재료로 만드는 첫 번째 절차이다. 생물로부터 생명을 앗아가고, 가죽과 내장, 근육을 분리하고, 정갈하게 각을 떠 우리의 신체와 유사한 신체로 해석될 가능성을 차단한다. 도살의 특이점은 신체의 특이점에서 비롯된다. 신체는 물질이면서 동시에 정신이 기거하는 거처다. 인간은 생명이 가진 회복력, 다시 말해 엔트로피를 감소시키는 능력을 설명할 수 없다. 그런 점에서 신체는 마법에 걸린 사물과 유사하고, 도살은 그 마법을 푸는 흑마술에 가깝다.
도살이 신체로부터 생명의 이미지를 분리해내는 행위라는 점과는 역설적으로 도살 행위 자체가 주는 이미지는 식재료에 생명의 이미지를 더욱 뚜렷하게 각인시킨다. 그래서 생물의 신체를 소비하는 관습을 형성한 인간은 도살을 심연으로 몰아냈다. 도살뿐만 아니라 도살을 연상시키는 모든 행위도 공동체 바깥이나 가정 속으로 숨어 들어갔다. 조선시대에 도살을 업으로 삼았던 백정뿐만 아니라 갖바치라 불리는 가죽 공예인들이 함께 천대받았던 역사는 도살에 대한 인간의 태도와 궤를 같이한다.
반면 채식주의는 도살이 가진 마술적 힘을 부정하는 움직임이다. 도살을 거친 식재료를 보면서도 신체의 이미지, 생존본능과 운동과 호흡의 이미지를 해석하는 태도가 바로 채식주의다. 인간이 타인의 해석을 강제할 수 없다는 점에서 채식주의가 하나의 정략적 구호가 된 것은 안타까울 따름이다. 그러나 신체의 조각에서 생명의 모습을 떠올리는 능력은 인정해야 한다. 채식주의는 인간이 가진 고귀한 능력, 즉 공감과 연민을 모방한다. 그러나 완벽한 채식주의는 금식이고, 숭고한 아사다. 채식주의가 정치 영역에 구호로 등장하는 순간 정치화된 종교와 다를 바 없어진다.
직장인의 철학 ─ 왜 일한 건 티 내야 할까
1화 일꾼과 말꾼
4화 우리가 사는 세계
5화 사내정치를 위한 변명
7화 보이지 않아 사라지는 것들(방금 읽은 글)
8화 가장 어두운 범죄
9화 있어 보이는 비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