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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재영 Mar 06. 2017

우르르, 까꿍!

2017년 3월 6일, 쉰한 번째

버스를 타고 가던 길이었다. 엄마 등에 업힌 아기를 만났다. 보드라운 털모자를 쓰고 있었고, 둥근 볼에는 털모자만큼이나 보송보송한 솜털이 있었다.

아기를 만나면 나는 언제나 손으로 얼굴을 가린다. 가렸다가, 까꿍! 하고 나타난다. 그러면 아기는 눈을 크게 뜨거나 자지러진다. 웃는 아기를 보고 나도 웃는다.

그 이유를 들은 적이 있다. 얼굴을 가리면 아기는 그 사람이 사라졌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란다. 그러다 얼굴이 나타나면, 아기에게는 어딘가로 없어졌던 사람이 다시 나타난 것과 마찬가지다.

어린 아기에게는 모든 일이 새롭다. 모든 일이 금시초문이고, 기묘하다. 그런데 따지고 보면 기이할 이유가 없다. 애초에 익숙한 일이 없기 때문이다. 낯익은 일이 없으니 낯선 일도 없다. 모든 사건은 의식의 백지를 채워나간다. 우르르 까꿍을 한 오십 번쯤 계속 하면 아기도 심드렁해지려나.

어른이 된다는 건 지루할 줄 안다는 뜻이다. 그럴 줄 알았다, 는 말은 어른만이 쓸 수 있는 말이다. 어른은 몇 번의 우르르 까꿍을 겪으면서 이번 우르르 까꿍에서도 역시 그 사람이 다시 나타나리라는 가설을 세운다. 그 가설을 '경험'이라 부른다. 어른은 경험으로 미래를 예측하는 일을 좋아한다.

귀납법이 필연적이지 않은 만큼, 어른의 경험은 어쭙잖다. 그러니까, 모든 어른은 우르르 까꿍을 하던 사람이 정말로 사라질 때 놀라움을 느끼게 되는데, 세상엔 그런 일이 종종 일어난다는 거다. 세균이 그랬고 천동설이 그랬다. 우리들의 지루함은 속이 상하리만치 어쭙잖다.

지루한 사람은 의식의 백지를 채울 수 없다. 좀 더 쉽게 말해볼까, 꼰대는 못 배우'는' 놈이다. 엄마 등에 업힌 아기가 부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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