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방적인 커피는 사양합니다.
새 직장은 복장 규율이 거의 없는 편인데, 어느정도인가 하면 미팅이나 행사가 있는 날 정도에만 깔끔하게 차려입으면 평상시에는 후드에 품이 넉넉한 바지 그리고 샌들을 신어도 아무 문제가 되지 않는 편이다. 나이나 직책, 업무에 따라 복장의 격식정도가 달라질 수 있겠으나, 옷차림으로 누군가를 눈치주거나 지적하는 일은 없다고 봐도 무방하다.
나는 예쁜 옷도 좋아하지만 그것이 편안함보다 우선이라고 생각지는 않아서 평소에는 캐주얼하게 입고다니는 편이다. 그날도 나는 흰색 박스티, 그리고 후들후들한 청색 핀턱 슬랙스에 슬리퍼를 신고 산책중이었다. 실은 사무실 용으로 가져다 놓은 슬리퍼인데, 사무실이 문 하나만 나가면 아예 야외이다 보니 안 팎 구분없이 신는 슬리퍼로 이용하게 되었다.
매일 가다시피 하는 가깝천(가까운 청계천을 홀로 줄여부르는 이름이다) 다리 밑을 향해 걷는 중인데 누군가 앞에 비슷한 보폭으로 걷고 있는게 보였다. 어쩌다보니 어정쩡하게 따라 걷는 형국이어서 나는 얼른 그를 앞질러 걸은 뒤 다리 밑그늘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내가 그를 추월하여 지나갈 때 왠지 나를 슬쩍 바라보는 기분이 들었지만 자리에 앉아 뒤를 살피니 그는 계단을 타고 올라가 산책로를 벗어나고 있었다.
언제나처럼 다리 밑에 자리를 잡고 앉아 노래를 들으며 사냥중인 새 구경을 하는데, 누군가 편의점 커피를 내려놓으며 곁에 앉았다. 단순히 자리가 있어 앉았다기에는 너무 빈 계단이 많아서 나는 이어폰을 잠시 내려두고 옆에 앉은 사람을 바라봤다. 좀 전에 내가 추월해 지나간 남자였다. 그는 내게 커피를 건네며 말을 건냈다.
“안녕하세요, 지나가면서 우연히 봤는데, 친해지고 싶어서요. 학생이세요?”
아니요, 라고 대답하며 나는 어색한 표정을 지어보였다. 얼른 벗어나고 싶은 상황. 산책을 방해 받고 싶지 않았지만 나는 내가 떠나는 대신 그가 자리를 비켜주기를 바랐다. 슬리퍼 차림으로 핸드폰만 덜렁 들고 홀로 앉아있는 내가 학생이 아니라고 대답하니 그는 지레 짐작으로 말을 이어가기 시작했다.
“아아, 저도 사실 얼마전에 직장 그만두고 취업준비 다시 하고있거든요. 저와 처지가 비슷하시네요. “
‘처지’라는 단어를 듣자마자 나는 뜨악한 기분이 들었다. 학생이 아니라고 답했을 뿐인데 그는 내가 묻지도 않은 말들을 쏟아내며 나의 상황을 멋대로 판단하고 있었다. 나는 그가 문제집을 사러 동묘에 가던 중이라는 것과, 얼마전에 직장을 그만두어 우울하다는 말까지 들어야 했다. 그리고 말을 마친 그가 내게 물은 것은 나의 나이.
“혹시 나이가 어떻게 되세요?”
그게 왜 궁금하신데요? 라는 나의 대답에 그는 앵무새처럼 친해지고 싶어서요. 친구하면 좋잖아요. 라는 말을 반복했다. 저는 모르는 분과 친구하고 싶지 않은데요. / 그럼 알아가면서 판단하면 되겠네요. / 제가 왜요? / 그럼 메신저 아이디만 알려주고 싫으면 차단하세요. / 저는 곧 회사 점심시간이 끝나서 들어가봐야 겠네요. / 회사요..? 회사다니시나봐요? / 예 뭐. 저는 이만 가볼게요.
대략 위와같은 말을 나누다 그만 피곤해져버린 나는 처음의 오기 - 내 산책을 방해 한 건 그였으니, 얼른 자리를 비켜줬으면 좋겠다는 마음 - 를 지키는 게 거의 불가능 할것 같다는 판단을 하고 결국 자리에서 일어나고 말았다. 그와중에도 그는 자신만의 젠틀함을 잃지 않았는데, 내가 계속 거절하던 편의점 커피를 내쪽으로 밀고 자신도 자리를 털며 일어서며,
"커피는 제가 드리려고 한거니까 그래도 꼭 가져가 주세요. 안그러면 여기 두고 갈게요. 그래도 이런 용기를 낸걸 좋게 봐주실 수 있잖아요?"
라는 말을 남기며 떠났다. 그 일방적인 용기가 담긴 커피 한잔을 두고 나는 몇분을 실갱이 더 하다가 그만 알았으니 제발 가라는 마음으로 네, 네. 하며 산책을 마치고 돌아가는 발걸음을 서둘렀다. 그가 시야에서 멀어지자 안도감과 함께 커피를 든 손이 왠지 분했다. 나는 용기라고 포장한 무례함을 긍정해줄 생각이라고는 추호도 없는데, 어쩐지 그가 멋대로 스스로를 갸륵하게 여기고 있을 것 만 같았다.
나중에 지인 몇몇에게 글쎄말이야, 오늘 이런 일이 있었어. 라고 말하니 그러니까, 옷차림 때문에 너를 그렇게 봤나보다. 그러니까 슬리퍼 같은거 신지 말구 다녀~ 라는 말을 들었는데, 나는 앞으로도 내가 어떤 차림 하고 어떠한 모습으로 보여도 무례한 사람에게 산책길을 방해 받지 않는 나날들이 지속되기만을 바랄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