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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해성 Aug 26. 2023

눈 내린 평원

  쌓인 눈을 만지면 달라붙는다. 꽉 물어버린다. 백색 피라냐 떼처럼.

  길게 이어진 발자국을 보면 괜히 쫓고 싶다. 발자국엔 이야기가 있다. 발자국은 어디론가 이어지곤 한다. 단호하게 일정한 무게를 남기며 나아간 발자국이 있다. 어지럽게 갈피를 못 잡고 흩어진 발자국도 있다. 하지만 발자국이란 건 결국 어디론가 닿게 되고 다시 쓸쓸한 평원만 조금 눌려서 찌그러진 몸을 펴려 안간힘이다.

  어디로도 닿지 못한 발자국을 본다. 이건 대체 뭐지?  

  “나는 신비로운 눈송이를 품고 발자국을 견디지만, 발자국의 방향이나 향방을 입에 담는 것은 금지되었다. 무엇보다 나는 그냥 눈 내린 평원에 불과하니까 나한테 말 걸지 마.”

  그것은 아주 오래된 법도구나, 평원은 원래 방문자의 신원과 목적을 발설하지 않는구나. 눈 쌓인 날엔 더 조심스럽겠지, 작은 눈짓만으로 모든 비밀이 풀려버릴 수도 있으니까 특별히 조심해야 해.

  눈 내린 평원은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는다. 차가운 눈이 피라냐 떼가 되어 손을 물어뜯고 있다. 손을 마주 비비자 투명한 피가 흥건하다. 주변은 아주 고요해서 내가 지상에 남은 마지막 생명이 된 것 같다. 뒤에서 불어온 바람이 나뭇가지에 쌓인 눈의 홀씨를 공중으로 날리고 홀씨들은 평원으로 먼저 발을 딛고 있다.

  나는 작은 숲의 끝에서 그 광경을 보고 있다. 소중한 것이 있었는데 잃어버렸구나. 어제 이 눈밭에 모르고 심어둔 채 떠났다가 늦게 돌아온 것이구나. 그것은 지갑일 수도 있고 영혼일 수도 있다.

  잃어버린 것을 찾아서 주머니에 넣고 싶다. 발자국의 주인들은 이 모든 사실을 알고도 내가 없는 평원에 모여 내가 못 찾게 평원 위로 눈이 더 내리게 하자고 말한 것일까.

  땅에 딛는 무게만큼 쌓인 눈의 비밀을 알아낸다. 생명의 축제다. 작은 새는 작은 새의 무게만큼 비밀을 알아내지만, 나보다 많은 것을 알고 있는 것 같다. 맑고 예쁜 소리를 낸다. 새가 평원을 떠나지만, 평원은 뒤따르지 않는다. 어제는 나에게 비밀을 다 털어놓고 울어버리는 사람을 봤다. 미안하다며 문을 나서는 그를 나는 쫓아 나가지 않았고 그 모든 것이 까마득한 옛날 일 같았으나 그것은 불과 어제의 일. 어제는 분명히 눈이 쌓이지 않았는데, 하염없이 내리는 눈을 사람들과 맞으며 이 평원을 뛰어다닌 기억이 있는데, 그것들이 불과 어제의 일이었다.

  손은 계속 자기가 손이라는 것을 알리듯이 아프다. 어제는 분명히 따뜻했던 손이 오늘은 차갑다. 어쩌면 그 사람의 손을 잡아주거나 어깨를 잡아줬어야 했는데.

  흐르지 않는 은백색 강물인 평원이 내 앞에서 침묵하고 있다. 발자국은 어디론가 이어져 있다. 어디에 닿았을까. 그곳에서 찾던 것을 찾았을까. 나는 잃어버린 것을 생각했으나 상당히 막막했다. 백골처럼 탈색된 기억이 이미 장례 절차에 들어갔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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