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류애

인류애의 소멸과 생성

by 초이

회사를 다니다 보면 사람을 많이 만나게 된다. 그런데 나는 사람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다. 인류애가 없다. 20대 초반에 지금의 직무로 진로를 선택한 이유도 사람을 만나는 것이 싫어서다. 후반 작업이 가장 사람을 안 만날 수 있는 일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12년간 일을 하다 보니 인류애라는 것이 없어도 사람을 대하는 방식을 저절로 습득하게 되었다.


현재 회사에서 매일 봐야 하는 분들은 나에게 얼마 없는 인류애를 강탈해 간다. 더 미워할 구석이 없을 거라 생각했는데, 창의적인 방식으로 기분을 상하게 한다. 효율성은 전혀 고려하지 않고, 직원의 편의성 따위는 단 하나도 생각하지 않는 관리자들의 모습은 인류애는커녕 인간에게 혐오감마저 들게 한다. 멍청한 사람도 싫고 이기적인 사람도 싫고 공익을 해치는 사람도 싫다. 근데 우리 회사의 그분들은 저 3가지를 모조리 가지고 계신다. 그러니 내 인류애는 시들다 못해 흔적마저 사라지게 된다.


이 회사에 오면서 새로 맡게된 업무때문에 일로 만나야 하는 사람은 정말 다양해졌다. 타 기업의 직원, 산하 기관의 직원, 후원자, 대상자, 탈북민, 제3 국 출생자, 자영업자 등 전혀 교집합이 없는 사람들을 만나곤 한다. 그중 기억에 남는 몇 분이 계신다. 그분들의 공통점은 딱 하나다. 나에게 인류애를 충전시켜 주신 분들이다.


일 때문에 만난 회사 밖 사람들은 나의 인류애 전용 인공호흡기다. 명절에 소정의 물품을 들고 찾아간 한 할아버지는 앞이 잘 보이지 않는 분이셨다. 우리가 드린 물품은 사실 그분들의 삶에 일시적인 도움이 될 뿐 근본적인 해결책이 될 수 없다. 그분도 그걸 잘 아셨을 것이다. 그런데도 우리에게 과하게 고마워하시며 절을 하겠다며 벌떡 일어나셨다. 그 순간 민망하고 속상하고 짠함을 느낌과 동시에 작은 것에 감사하는 그분의 모습에서 사람에 대한 무한한 신뢰를 느꼈다.


또 다른 분은 제3 국 국적을 지니신 분인데 손자와 함께 살고 있는 할머니였다. 손자는 태어났을 때부터 혈우병을 앓았다고 한다. 아이가 어릴 때 한국에 들어와서 한 기업의 도움을 받아 치료를 했다고 한다. 본인도 암을 앓기도 했다. 어려운 형편에 손자까지 키우기 위해 안 해본 일이 없으셨다. 동네 마트에서 일을 너무 잘해서 스카우트 제안까지 받았던 이야기도 해주셨다. 본인이 아프고 나서는 아픈 사람들을 돕고 싶다는 마음이 들어 간병인으로 일을 하신다고 했다. 할머니의 얼굴에 난 주름은 그분의 성품을 보여주었다. 정말 활짝 웃어서 생긴 다정한 주름이었다. 그분은 힘든 현실에서도 모든 것에 감사를 하는 분이셨다. 나는 나에게 주어진 타인의 호의에 얼마나 고마움을 표현하고 살았을까? 이분의 삶에서 나는 또 많은 것을 배우고 느꼈다.


업무차 식당을 운영하는 사장님을 만났다. 우리 회사에 매월 소정의 금액을 기부하시는 분이었다. 가게를 홍보하는 콘텐츠를 만들겠다고 찾아간 그곳에서 사장님과 많은 대화를 나눴다. 사장님은 소액을 기부하는 것에 대해 부끄러워하셨다. 그 얘기를 들은 나는 너무 놀라 사장님이 얼마나 대단한 일을 하시는지 아셔야 한다고 말씀드렸다. 그렇게 말해주셔서 너무 감사하고 작지만 도움이 된다는 생각이 들어서 행복하다고 하셨다. 요즘 매출이 잘 나지 않아 버티기 중이신 사장님. 30년 간 가게를 운영하느라 해외여행을 며칠 전에 처음으로 다녀왔다고 했다. 본인의 형편이 매우 좋지 않으면서도 소액이라도 기부하는 마음은 어디서 나오는 걸까? 우리를 만나보니 그 기부가 더 기쁘고 행복하다며 식사를 대접하고 싶다고 하셨다. 그 식사를 어찌 대접받는단 말인가. 이미 사장님의 마음에서 많은 것을 받았는데 말이다.


이렇듯 나의 인류애는 유지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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