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편견에 대한 고백 그리고 반성
점심을 먹으러 식당을 가도, 커피를 마시러 카페를 가도 이제는 키오스크 기계가 있다. 그 기계를 통하여 주문을 하는 세상. 효율만 따지면 기계가 사람보다 장점이 많다. 그러나 노인들에게는 식당도 카페도 두려운 공간이 되어 버렸다. 누군가에게는 터치 하나로 모든 것이 되는 편리한 세상이 누군가에게는 모든 것과 단절된 외로움을 준다. 단순히 식당, 카페의 문제가 아니다. 연말 정산을 신청하거나 무언가를 예매할 때도 디지털 소외계층은 누군가의 호의를 바랄 수밖에 없다. 따라갈 수 없는 속도로 변하는 세상에 그들의 늙음은 조롱이 된다. 그리고 생존에도 문제가 생긴다.
고백하건대 나도 노인들을 좋아하지 않는다. 대중교통에서 마주친 노인들의 꼬장함에 질려서 그들에게 호의적인 시선을 보내지 않는다. 꼬장한 그 어르신이 노인의 대표도 아니 것만 나에게는 그런 모습들이 쌓여 단단한 벽을 세웠다. 이런 모습을 보면서 나는 늙음이 무서워서 젊음의 끝을 부여잡고 있게 된다.
우리에게는 노인을 미워할 권리가 없다. 태어나면서부터 불특정 어른들의 호의와 배려로 자라왔으면서 자기 앞가림 좀 할 줄 안다고 그들을 혐오할 자격을 누가 준단 말인가. 대중교통에 탄 노인이 진상이었단 이유로, 나에게 살짝 피해를 줬단 이유로 그들을 미워해도 되는가. 반성의 시간을 가져본다.
빠른 변화는 노인들에게 박탈감으로 자리 잡는다. 편하게 타던 기차나 시외버스는 온라인으로 예매하지 않으면 탈 수 없는 시대가 되어 버렸다. 집 앞에 있던 식당에서 돈이 있는데도 음식을 사 먹기 어려워졌다. 마음은 아직 청춘인데, 먹고살 돈이 있는데 그들은 왜 소외를 당해야 하는가. 그들에게 아무 대책을 주지 않은 채 매일 빠르게 변화하는 이 세상은 참 야속하다. 젊은 사람들은 디지털 소외계층인 그들을 보듬어주지 않는다. 뾰족한 시선으로 바라본다.
출생률은 줄어들고 생존 연령은 증가하고 있다. 그래서 몇십 년 후에는 지금보다 노년 인구가 훨씬 많아질 것이다. 지금 노인을 위한 노력은 곧 미래의 자신을 위한 노력이란 거쯤은 알고 살아가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