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17. 그게 어디건 나는 네가 절실해
이어폰의 맛을 처음 알게 된 게 언제쯤일까. 중학교에 입학할 즈음 CD 플레이어에 맛을 들이면서인 것도 같다. 백팩에 플레이어를 넣고 이어폰 선만 꺼내 귀에 꽂고 다니는 게 멋이었는데, 정지를 시키려면 굳이 가방을 앞으로 돌려 매야 했다. 번거로운 줄도 모르고 음악을 들었다.
이어폰을 꽂으면 그게 어디든 나만의 세계로 갈 수 있었다. 유난히 공상과 혼잣말을 좋아하는 내게 이어폰은 좋은 동반자였다. CD를 얼마 듣기도 전에 아이리버의 MP3가 대 유행을 했는데, 전교에서 가장 먼저 컬러 화면의 256MB 아이리버 MP3를 산 게 바로 나였다. 지금이라면 상상도 못 할 그 작은 용량 안에 나만의 플레이리스트를 꽉 채웠다. 음악을 들으며 온갖 판타지같은 공상을 했다.
대학교에 가서도 이어폰은 늘 꽂고 다녔다. 등하굣길이 편도 1시간 즈음이 되면서 2시간짜리 라디오 프로그램을 반절씩 들으면 하루가 갔다. 가수 성시경이 제대 후 라디오를 한창 할 때였다. 스마트폰이 대중화되고, 라디오 녹음본을 어플로 들을 수 있었다. 팟캐스트의 세계도 처음 알게 되었다.
외국에 가서 이어폰을 꽂으면 또 다른 세계가 펼쳐졌다. 눈앞의 풍경과 딱 맞는 BGM을 깔기도 하고 그리운 한국어를 풍족하게 듣기도 했다. 이어폰 줄이 덜 엉킨다는 칼국수 줄을 사기도 했는데, 얇은 줄이건 칼국수 줄이건 얽히고설켜 얼마간 쓰면 고장 나기는 마찬가지였다. 어느 인터넷 꿀팁으로 알게 된 안 엉키게 정리하는 법을 몇 년쯤 사용했지만 그것도 완벽한 해결책은 아니었다.
그러던 어느 날, 갑자기 사람들이 귀에 콩나물을 꽂기 시작했다. 저거 불안해서 어떻게 끼고 다니나 싶었는데 어느새 내 손에도 버즈가 들어왔다. 무선의 세계로 온 나는 다시는 유선으로 돌아가지 않았다. 칼바람이 부는 겨울에 나는 코트 깊숙이 핸드폰과 손을 찔러 넣고 입만 나불대며 통화를 했다. 비가 와도 우산과 핸드폰을 동시에 드느라 고생하지 않았다. 무선은 내게 귀가 아닌 손의 자유를 가져다주었다. FREEDOM!
그렇게나 사랑하는 이어폰을 나는 15년 이상을 매일 들고 다녔다. 그럼에도 이어폰의 세계 전혀 질리지 않았다. 가끔 이어폰을 잊어버리는 재앙 같은 날이 있다. 눈치를 챘을지도 모르겠지만 오늘이 바로 그 재앙의 날이다. 퇴근 후 헬스장에 도착해서야 나의 사랑 버즈를 책상 위에 두고 왔음을 알았다. BGM 없이 견뎌야 했던 한 시간 반의 운동은 그 자체로 슬픔이었다. 내일은 출근 전에 운동에 가야 하는데. 휴, 벌써부터 힘에 겹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