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18. 사소함의 소중함
초등학생 3학년 때 엄마는 이제부터 용돈기입장을 쓰면 용돈을 매주 수요일마다 지급한다 하셨다. 용돈기입장? 어리바리한 언니와 나에게 엄마는 달력을 하나씩 건넸다. 날짜마다 쓴 돈을 적으면 돼. 나는 늘 기입장 쓰기를 밀려서 용돈을 받아야 하는 날이 되면 내가 어디에 돈을 썼는지 아는 사람을 찾았다. 엄마의 도움을 받아 내역을 날조하고 용돈을 받았다. 어쨌거나 완성은 완성이니까. 몇 년의 수행 덕에 지출을 기록하는 습관이 생겼다.
고등학생 때부터 다이어리 꾸미기를 좋아해서 매년 다이어리를 샀다. 한때 잡지 에디터를 동경했는데, 근사한 가죽 커버의 다이어리를 끼고 인터뷰하는 이미지가 멋져 보였다. 달력에 빼곡한 마감 일정이 세련된 커리어우먼처럼 보였고. 따라 하고 싶었지만 문제는 내게 도대체 적을 일정이 없었다. 과제 마감 몇 건을 초라하게 적어두고 나면 시험 기간이나 친구와 노는 일정 정도를 적어둘 수 있었다. 내가 생각한 멋은 이게 아니라고! 대학 시절 내내 달력은 대체로 스티커를 가득 채웠다. 잘 꾸며지면 그렇게 뿌듯했다.
회사원이 되고 나니 다이어리를 들고 다닐 여유가 없었다. 업무 노트도 있었고 스마트폰도 워낙 발달했으니까. 대신 회사에서는 매년 달력을 줬다. 주로 점심 약속을 적었다. 모두가 똑같은 용도로 달력을 썼다. 달력에 적어둔다는 말은 너와의 점심 약속이 정해졌단 뜻이 되었다.
그 사이 집의 달력은 완전히 달라졌다. 부모님은 언젠가부터 은행에서 나온, 무려 ‘손 없는 날’이 굳이 적혀있는 커다란 달력을 쓴다. 할머니 댁에서나 보던 달력이 우리 집 정 중앙에 있다니. 한 번에 3개월을 커다랗게 볼 수 있는 달력도 있다. 쓰여 있는 내용도 판연히 달라져서, 요즘은 병원 가는 날이 주로 적혀 있다. 나는 내 생일에 커다랗게 표시를 했다. 스마트폰 달력은 두 분 다 쓰시지 않았다. 대단히 콩알만 했기 때문이다.
하루에 몇 번이고 달력을 쳐다본다. 날짜만큼이나 그 시간을 함께 보내는 사람들을 확인한다. 달력을 보며 부모님이 무탈하셨으면, 오늘은 재밌는 점심시간을 보냈으면 하는 작은 바람을 떠올린다. 대단치 않아도 좋으니 이 별 일 없는 달력이 계속 이어졌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