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원전 중국 춘추전국시대의 공용화폐였던 검(劍), 도과(刀貨)와 명도전(明刀錢)의 역사에 대해 알아보도록 하겠다.
춘추전국시대(기원전 770년~ 기원전 221년)는 중국 역사상 가장 혼란스러우면서도, 동시에 세계 역사상 가장 긴 전쟁기(약 500년간의 대전쟁 시대)이기도 했다. 그렇기에 중국은 이 춘추전국시대의 500년간의 대전쟁기를 거치며 군사력은 물론, 정치 체계, 여러 사상(제자백가 등), 그리고 상공업까지 모든 면에서 비약적으로 발전한 시기였고 중국이 고대시대 때부터 세계적인 대제국으로 군림할 수 있었던 배경에는 이런 500년간의 치열한 전쟁 시대로 인해 국가의 모든 분야들이 엄청나게 발전했기 때문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중국은 이미 기원전 때부터 "화폐"를 발명해서 쓰기 시작했는데, 이미 기원전의 주나라의 봉건 체계가 무너지고 제후국들이 난립하며 부국강병을 추구하는 이 과정에서 물물교환의 불편함을 해소하기 위해 각 지역의 특색에 맞는 금속 화폐가 등장했다. 한반도 국가인 조선의 경우는 후기까지도 화폐 시스템을 도입하지 못해서 물물교환에 의존했었는데, 중국은 이미 기원전 때부터 세계적으로 가장 발전한 화폐 시스템을 구축한 것을 보면 정말 어마어마하게 대단한 것이다.
기원전 중국의 대표적인 화폐는 바로 도전(刀錢)이다. 도전은 손칼(삭, 削) 모양으로, 주로 동방 국가들(연나라, 제나라)과 북방 국가에서 사용했다.
원래 "삭"은 대나무 죽간에 글을 쓰다가 틀렸을 때 긁어내는 지우개 역할이나, 가죽을 다듬고 고기를 해체하여 자르는 정형칼 같은 해체용 도구였다. 이것이 교환 수단으로 쓰이다가 점차 화폐의 형태(도전)로 진화한 것이다.
이러한 "도전(刀錢)"은 형태와 시기에 따라 크게 첨수도(尖首刀), 방수도(方首刀), 명도전(明刀錢) 등으로 분류된다.
첨수도(尖首刀)는 춘추시대 후기~ 전국시대 초기의 가장 최초의 도전 형태로, 칼끝이 날카롭게 뾰족한 형태의 도전이다. 첨수도는 실제 칼(무기)의 형태와 가장 흡사하다. 이는 화폐가 칼에서 파생되었음을 보여주는 강력한 증거다. 주로 융적(戎狄)이라 불리는 북방 유목 민족의 영향권들과 연나라 지역에서 출토된다.
추운 북방의 유목 생활을 하던 상무정신이 세계에서 가장 강한 북방의 유목민족들에게 "단검"이나 "칼"은 무기이자 필수품이었고, 이것이 가장 신뢰할 수 있는 교환 수단이 되었던 것이다.
방수도(方首刀)는 칼 머리 부분이 네모진 형태의 검 동전이었다. 이 방수도는 연나라뿐만 아니라 조나라 등에서도 일부 사용되었으며, 지역에 따라 침수도(針首刀) 등 다양한 변형도 존재한다. 이는 기원전 중국 대륙 전 각 지역 공방에서 독자적으로 주조했음을 시사한다.
그리고 이런 방수도, 침수도의 최종 진화 형태가 바로 명도전(明刀錢)이었다. 명도전은 표면에 "명(明)"자 형태의 문자를 각인시킨 검 모양 화폐다.(학계 일각에서는 이를 "역(易)"이나 "소(召)"로 읽어야 한다는 주장도 있으나, 통상 명도전으로 칭한다.)
명도전의 경우는 전국시대 연(燕)나라와 제(齊)나라에서 주로 사용되었으며 길이 약 13~14cm, 무게 15~16g 내외. 칼등이 약간 굽어 있고 칼날은 안쪽으로 휘어 있는 것이 특징이다. 끝에는 끈을 꿸 수 있는 구멍(고리)도 있다. 연나라의 군사력이 확장되면서 명도전은 요동 지방과 한반도 서북부(청천강 이북)까지 광범위하게 유통되었다.
그럼 왜 기원전 춘추전국시대 때 화폐들은 굳이 "검"이었을까? 이는 크게 2가지 이유가 있다고 보면 된다. 1번 째는 상무정신이 강했기 때문이고, 2번 째는 기능 화폐의 역할도 강했기 때문이다.
기원전 중국 화폐는 "기능 화폐"에서 기원한다. 이는 문명 국가에서는 포전이 중요했고, 전쟁 수행 능력은 물론 수렵, 유목, 목축, 어업 사회에서는 검(도전)이 생존에 필수적이었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사무라이처럼 인류 역사상 검을 가장 숭상하는 사상을 가졌기 때문이라기보단, "검이 곧 가치였기 때문"에 화폐가 된 것이다. 물론 그런 점에서는 검을 숭상하는 사상이나 문화라고 볼 수도 있겠다. 어쨌든 기원전 중국에서 검은 사냥, 조리, 목공, 죽간 기록 수정 등 만능 기능 도구였기에 누구나 강력한 검을 원했으므로, 그런 문화에서 파생되어 검은 교환의 매개체가 되기 쉬웠다.
상무적(尙武) 분위기의 영향도 한몫했다. 춘추전국시대는 500년이 넘는 끊임없는 대전쟁의 시기였다. 연나라는 북방의 중앙아시아계의 튀르크계나 수많은 유목 민족들의 강대국들(산융, 동호)의 끊임없이 침략을 막아내고 있었는데, 비록 화폐의 기원은 "기능 도구(삭)"였지만, 국가가 이를 공식 화폐로 채택하고 대량 주조할 때 검의 형태를 유지한 것은 당시 국가 정부가 무기나 금속 도구에 부여한 권위와 신뢰를 반영한다. 청동은 당시 기원전이었기에 전략 물자였으며, 청동으로 만든 검 모양 화폐는 그 자체로 국가의 군사력과 기술력, 경제력을 상징하는 신용의 징표였다.
명도전은 평안북도, 요령성 등지에서 한반도에서도 대량으로 출토됐다. 이는 기원전 중국 연나라와 고조선 사이의 활발한 전쟁, 혹은 무역(고조선은 호랑이 모피 무역이나 중개 무역(仲介貿易)으로 유명했다)을 의미한다.
과거에는 명도전 출토 지역을 모두 연나라의 영토 즉, 식민지로 해석하는 경향이 우세했었으나, 최근에는 "화폐의 정치적 영토와 경제권은 일치하지 않는다"는 견해가 우세했기에 즉, 고조선 사회에서도 명도전이 기축통화 혹은 고액 결제 수단으로 통용되었음을 의미하는 것이지 고조선이 연나라의 식민지라는 것은 절대 아니다. 다시 말해서 현재 대한민국이 단순히 러시아 루블, 중국 위안, 일본 엔, 미국 달러를 공용 화폐처럼 쓴다고 그 나라들의 식민지가 되는 것은 아닌 것처럼 말이다.
그렇다면 이제 시간을 기원전에서 한참이나 미래로 달려가보도록 하겠다. 철의 제국이라고 불리는 기원후 국가인 고대시대 가야는 왜 철검이나 철을 대량 생산해서 가야의 철검과 철이 동아시아의 국제 화폐로 유통되고 쓰였던 것일까? 가야 철정(鐵鋌)과 "검철" 화폐의 역사도 같이 알아보도록 하겠다.
기원 전후 한반도 남부의 변한(弁韓 후에 가야로 발전) 지역은 질 좋은 철광석이 풍부하기로 유명했다. "삼국지 위서 동이전"에는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다.
"나라에서 철(鐵)이 생산되는데, 한(韓)나라, 예(濊), 왜(倭)나라가 모두 와서 가져간다. 물건을 사고팔 때 모두 철을 사용하니 마치 중국에서 돈(전, 錢)을 쓰는 것과 같다."
이 가야에서 사용된 철정(鐵鋌) 화폐는 학계에서는 "덩이쇠"라고 불린다. 덩이쇠란 길쭉하고 납작한 판 모양으로 양 끝이 약간 넓어지는 형태의 철 화폐다. 마치 현대의 골드바(Gold bar)와 같은 개념이라고 보면 될듯. 가야의 철 화폐도 묘하게 검(劍)의 하단부 칼날을 연상시키기도 하지만 이는 가공하기 가장 좋은 중간재 형태를 띤 것이다.
이 가야의 철 화폐(덩이쇠)는 매우 강렬한 장점을 가지고 있었는데, 규격화에 성공하다 보니 규격화된 무게와 크기로 제작되어 교환 수단으로 사용됐는데 이는 필요시 대장간에서 녹이거나 두드려 즉시 무기(검)로도 제작 가능했다. 특히 한반도는 고대시대인 삼국시대~고려시대까지 그야말로 대전쟁의 시대라고 할만큼 전쟁이 일상이었던 시대였기에 그런 시대에서 철, 강철은 그야말로 국가에서 반드시 갖춰야할 필수품 중에 필수품이었다.
그렇다면 왜 가야 때문에 한반도 화폐가 "철, 검" 형태가 되었을까? 앞서 말했듯 고대 사회에서 철은 곧 국력이었다. 철은 청동보다 훨씬 강하여 강력한 무기를 제작, 생산해낼 수 있었다.
잠시 삼천포로 빠지자면 기원전인 고조선이나 고대시대인 가야보다도 훨씬 머나먼 미래의 라틴 아메리카의 아즈텍 문명, 잉카 문명, 마야 문명이 그 어마어마하게 많은 인구수로 인해 풍부한 노동력과 식량 생산력과 건축과 의학을 가졌음에도 스페인인들에게 허무하게 박살난 것은 무엇 때문일까? 바로 "균"과 그리고 "철" 때문이었다. 잉카 문명, 아즈텍 문명, 마야 문명이 살고 있는 신대륙은 구대륙과 오랫동안 단절된 상태로 살았던 데다가 잉카 문명, 아즈텍 문명은 서로 파나마의 열대 기후가 가로 막고 있어서 서로 망할 때까지 왕래조차 불가능했으며 서로의 존재조차 알지 못했다. 그로 인해 잉카 문명과 아즈텍 문명은 교류를 못했기에 결국 잉카, 아즈텍, 마야 문명 셋 다 기원후 16~17세기까지도 "구석기~신석기" 상태에 머물렀고 "청동기" 조차도 무기로 만들지 못했다. 잉카, 아즈텍, 마야의 대표적인 석기시대의 무기인 "마쿠아후이틀"만 봐도 답이 나온다. 그런데 그런 잉카, 아즈텍, 마야 앞에서 철로 만든 활과 총을 들고 온 스페인인들이 당도하니 싸움은 안봐도 뻔했다. 잉카, 아즈텍, 마야는 원거리 장비는 전혀 없었는데 스페인인들은 죄다 원거리로 싸우는 병사들이었기 때문이다. 기원전의 고조선도 당시 16세기에 철기를 쓴 스페인처럼 이미 기원전인 위만조선 때부터 "철제 무기"를 썼었다.
그렇기에 "철"이란 것은 곧 국력이었다. 가야는 이 철을 제련하여 규격화된 "덩이쇠"로 만들었고, 이것이 동북아시아의 기축통화가 되었다. 철정(덩이쇠)은 그 자체로 "잠재적인 철검"입니다. 고구려의 경우 제철 기술력이 워낙 뛰어나서 "강철검"까지 제작이 가능했지만 말이다. 가야의 무덤에서는 시신 아래에 덩이쇠들을 수십 장씩 깔아두는 풍습(부장품)까지 발견될 정도로 이는 저승에 가서도 이 철을 이용해 무기를 만들거나 부를 누리라는 강한 집념과 의지가 있을 정도로 가야인들은 그야말로 뼛속까지 대장장이 민족들이었던 셈이다.
가야는 철정뿐만 아니라 완성된 철검, 혹은 강철검(환두대도 등)을 일본(왜)과 한반도 타 국가들에 수출했다. 당시 일본은 솔직하게 말하면 가야보다도 군사력과 기술력이 훨씬 낙후된 국가였고, 가야는 고구려 다음으로 한반도 국가들 중 제철 기술력이 워낙 뛰어났기에 가야산 철과 검은 그 자체로 고가에 거래되는 "고액 화폐"의 성격을 띠었다.
기원전~고대 일본 초기는 아직 문명의 초기 단계라서 가야의 덩이쇠를 대량 수입하면서 일본 내에서 절대적인 가치를 지닌 화폐로 발전했다. 신라 진흥왕과 법흥왕의 침략으로 가야가 멸망한 후에도 이 제철 기술과 철기 문화는 신라와 일본으로 그대로 흡수되어 고대 국가 형성에 결정적인 역할도 했다.
기원전 중국 춘추전국시대의 명도전과 기원후 고대 가야의 철정은 모두 "전쟁과 생존에 필수적인 무기(검, 철)가 가치를 지닌다"는 공통점에서 출발했다. 기원전의 명도전이 "검 모양을 각인한 청동검"이었다면, 기원후 고대 가야의 철정은 "실제 철제 무기가 될 수 있는 실질적 철강 소재" 그 자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