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문명은 시공간의 차이가 어마어마하게 크지만, 높은 문명력과 농업 생산력을 바탕으로 "백성의 안위"를 통치 철학(고대 이집트는 마아트, 근세 조선은 민본주의)의 핵심으로 삼았다는 공통점이 있습니다. 가장 번영했던 시기를 기준으로 "고대 이집트(신왕국 18~19왕국, 기원전 1550~1200년경)"와 "조선(17~18세기 영, 정조 시대)"을 비교 모델로 설정하여 분석해봤습니다.
조선시대의 경우는 초기까지는 군사력이 강했기에 화약 기술력이나 군사력이 동시대의 스페인, 포르투갈, 네덜란드보다 훨씬 막강했을 정도였지만(조선 초기의 스페인과 포르투갈은 이슬람 후우마이야 왕조의 식민지였기에) 아쉽게도 전쟁과 내전이 많았기에 살기 좋았던 시대는 아니었던 만큼 조선 역사상 가장 살기 좋았던 시대는 전쟁이 그나마 적었던 평화기인 영, 정조 시대의 후기부터였습니다.(하지만 정치적으로는 극단적인 대립이 심각해지기 시작하던 시기이기도 했습니다)
1) 인구 규모 및 밀도 비교
고대 이집트의 인구
고대 이집트의 추정 인구는 학계(Karl Butzer, David O'Connor 등)의 정설에 의하면, 이집트 문명이 가장 번성했던 신왕국 시대의 인구는 약 "450만 명 이상" 정도로 추정됩니다.
이집트는 나일강 유역의 좁은 경작지에 인구가 밀집되어 살았다고 해요. 전체 영토에서 사막을 제외하고 실질적으로 사람이 사는 "검은 땅(Kemet)"은 한정적이어서 마치 오늘날 대한민국의 서울처럼 한곳에서 모여 살았기에 인구 밀도가 매우 높았다고 해요.
조선의 인구
조선 시대의 인구 조사는 호구 단자를 기초로 하며 초기까지는 300~400만 명으로 추정되다가 17~19세기 기록과 현대의 추정을 합산하면 약 1,600만 명에서 최대 1,800만 명**으로 추정됩니다. 어떻게 갑자기 인구가 이렇게 폭증하느냐?
이는 후기에 발전된 농업 기술의 발전(이앙법 등)과 감자, 고구마 등의 도입으로 인해 부양 능력이 갑작스럽게 커졌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근세 조선 초기를 기준으로 보면 고대 이집트의 인구 숫자가 훨씬 더 많지만, 조선 후기를 기준으로 보면보다 조선의 인구 숫자가 4배 이상 많습니다.
하지만 1인당 가용 자원이나 주거 밀집도 면에서는 이집트가 나일강의 축복으로 인해 더 여유로웠을 것으로 보여요. 조선 시대의 한반도는 철광석들은 많았지만 금광석이나 은광석은 적었고 특히 식량 자원은 턱 없이 없었으니까요.
2) 복지 정책 및 빈민 구제 시스템(Ma'at vs 민본주의)
고대 이집트는 마아트(Ma'at)와 국가 배급제가 있었습니다. 고대 이집트의 통치 철학인 마아트는 진리, 정의, 우주적 질서를 지키는 것에서 시작되는데, 이는 곧 파라오가 백성을 밥을 굶주리게 하면 마아트가 깨지고 혼란(Isfet)이 온다고 믿었기에 이 마아트가 바로 서게 만드려면 백성들이 항상 잘 먹고 풍족하게 배불러야 했어요.
그리고 고대 이집트는 화폐 경제가 아니었기에 "돈"이라는 개념이 없었기에, "물물교환"으로 경제가 운영이 된 "현물 경제"였습니다. 즉, 먹는 음식이 곧 돈이었던 셈이지요. 국가는 수확된 곡식을 거두어 창고에 저장했다가 공공 근로(피라미드, 신전 건설 등)에 동원된 백성들에게 빵과 맥주를 매일 배급했지요. 이집트에서 빵과 맥주가 곧 돈이었거든요.
의료 복지도 매우 좋았는데 "데이르 엘 메디나(Deir el-Medina)" 유적 벽화에 의하면 이집트 정부에 고용된 장인과 노동자들에게는 "의사"가 배정되어 몸이 아플 경우에는 공짜로 치료를 받을 수 있었으며 휴가를 해도 곡식(급여)가 지급되었는 등 이는 동시대의 그 어느 국가들은 물론 훨씬 먼 훗날의 근세~근대 초기 시대인 조선은 물론 그보다도 더 뒤인 21세기의 대한민국이나 미국보다도 훨씬 더 좋은 의료 복지인 것 같아요. 이런 고대 이집트 왕국의 의료 복지는 인류 역사상 최초의 유급 복지 제도 가운데 하나이기도 해요.
고대 이집트의 빈민 구제책도 매우 우월했는데.. 이집트 신전은 거대한 곡식 창고 역할을 겸했기에 흉년이 들면 파라오의 부탁으로 신전 창고를 열어 백성들에게 곡식을 나누어 주었습니다. "나는 과부와 고아를 돌보았으며, 헐벗은 자에게 옷을 주었다"는 귀족들의 묘비명은 당시 사회가 요구한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보여주지요. 그래서 기독교 성경에서 보면 가나안 땅에 가뭄이 들자 야곱과 가족들이 이집트에 곡식이 풍족하다는 소식을 듣고 아들들을 보내 식량을 구해오게 했다는 것도 이런 이유 때문이지요.
조선의 환곡(還穀)과 진휼(賑恤)
조선의 통치 철학들 중 하나는 민본주의로 "백성은 나라의 근본"이라는 사상 이념 아래, 굶어 죽는 백성이 없게 하는 것이 국왕의 책무 가운데 하나였습니다. 이는 고대 이집트 왕국과 동일합니다. 그리고 이렇게 백성을 위한 민본주의 사상을 가진 국가는 동북아시아에서 오로지 조선만이 유일하며, 한국사에서도 오로지 조선만이 유일합니다.
조선 시대 이전까지 고려시대까지는 오로지 국가는 군인이나 귀족, 영주, 장군, 군왕들의 것이었지 백성의 것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그렇기에 민본주의를 내세운 정도전은 시대를 앞서간 혁명가라고도 하지만, 한편으로는 민본주의는 "공산주의" 사상 같다는 비판을 받기도 합니다.
환곡 제도는 춘궁기에 관청의 곡물을 빌려주고 가을에 갚게 하는 제도로 세계적으로도 선진적인 복지 시스템이었습니다. 물론 고대 이집트처럼 부유한 국가가 아니었기에 고대 이집트 왕국은 무료로 곡식을 배급해 줬지만 조선은 무료로 배급해 주진 않고 반드시 나중에 다시 되갚아야 했지만요.
그렇기에 조선 후기로 갈수록 환곡은 탐관오리들의 고리대금업, 수탈 수단(삼정의 문란)으로 변질되어, 오히려 백성을 괴롭히는 빚더미가 되기도 했습니다.
그렇기에 조선의 복지 시스템의 의도는 출발은 훌륭했으나 결국 후기에는 백성을 오히려 죽이는 "수탈"의 수단으로 변질됐으나, 실질적인 체감 복지는 이집트가 훨씬 더 좋았습니다. 고대 이집트 왕국은 워낙 풍요로운 자원과 경제를 가지고 있었기에 백성을 수탈하지는 않았거든요.
고대 이집트 왕국은 국가 프로젝트(피라미드 건설 같은)에 참여하면 의식주와 의료가 "직접 지급"되는 형태였고 강제 노역이라기보다 종교적 의무와 생계 보장이 결합된 형태였습니다. 반면 조선의 환곡은 결국 "빚"이었기에 기근(가뭄)이 계속되면 백성에게 큰 부담이 되어서 이를 참지 못하고 수많은 조선인들이 해적단, 산적단, 도적단들이 되는 결정적 계기가 되기도 했습니다.
3) 삶의 질과 행복, 그리고 "쾌락"(Pleasure)
기원전~고대 이집트인의 쾌락과 일상
기원전~ 고대 이집트인들은 "삶을 사랑하고 죽음조차 삶의 연장으로 본 쾌락주의적 성향"이 심했습니다.
식문화: 기원전~고대 이집트는 "빵과 맥주의 나라"였습니다. 남녀평등이 동시대에서 가장 좋았던 이집트였기에 남녀노소 누구나 도수 낮은 영양가 높은 맥주를 물처럼 마셨으며, 고기, 생선(물고기), 각종 과일(무화과, 대추야자), 꿀 등 먹거리가 풍부했습니다. 나일강의 정기적인 범람은 비료 없이도 매년 엄청난 풍작을 보장했습니다.
축제와 음주가무: 이집트에는 종교적 휴일이 매우 많았기에 오늘날 21세기의 주4일제처럼 마음껏 놀 수가 있었지요.
오뻬뜨 축제(Opet Festival): 약 27일간 계속되는 연회로 파라오가 막대한 양의 빵과 맥주, 고기를 백성들에게 공짜(무료)로 뿌렸습니다.
취기의 축제: 하토르 여신을 기리는 축제에서는 "취하는 것이 곧 여신과 소통하는 것"이라 여겨, 남녀가 어우러져 술을 마시고 춤추며 성적인 난교(에너지)를 발산하는 것을 신성하게 여겼습니다.
이는 억압적이고 보수적인 유교 문화와는 완전히 다른 개방적이고 쾌락적인 분위기였습니다.
성문화(Sexuality): 이집트인들은 성(性)을 부끄러운 것이 아닌, 생명 창조의 신성하고 즐거운 행위로 보았습니다. 남녀의 사랑을 다룬 연애시가 많이 전해지며, 시각적 자료에서도 부부의 애정 표현이 자연스럽게 묘사됩니다.
2. 조선 시대의 일상과 절제
조선 시대는 유교 윤리에 의해 "금욕과 절제"가 기본 미덕이었습니다. 양반 계층은 체면을 중시했고, 평민들은 과도한 노동과 세금으로 인해 축제를 즐길 여유가 없었습니다.
물론 조선 후기에도 농악, 판소리, 마을 잔치 등이 발생했으나 이는 소규모였고 기껏해야 1년에 1번 정도뿐이었고, 고대 이집트처럼 국가적 차원에서 1개월 내내 술과 고기를 뿌리며 "취하도록 권장"하는 문화는 없었습니다.
그렇기에 행복도와 쾌락적 측면에서는 "고대 이집트의 압승"입니다. 이집트인들은 현세의 즐거움(먹고 마시고 사랑하는 것)이 내세까지 이어진다고 믿었기에, 삶을 즐기는 데 죄책감이 없었습니다.
반면 조선은 엄격한 신분제와 성리학적 규율이 개인의 쾌락을 억제했습니다.
4) 여성의 인권과 지위 비교
이 부분은 고대 이집트가 전근대 문명 중 가장 독보적인 위치를 차지합니다.
고대 이집트 왕국의 여자
이집트 여성은 여러 면에서 남자와 거의 동등했습니다. 부동산을 소유하고 사고팔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자기의 이름으로 계약을 체결하고 유언장을 작성했습니다.
이혼 권리: 고대 이집트는 여자가 먼저 이혼을 요구할 수 있었으며, 이혼 시 자신이 가져온 지참금(재산)을 그대로 돌려받을 수 있었으며 "혼외정사"가 자연스러웠습니다.
사회 활동: 여자들은 여사제, 의사, 관리, 심지어 파라오(하트셉수트 등)가 될 수도 있었습니다.
의상: 더운 날씨 덕분에 몸의 곡선을 드러내는 얇은 리넨 옷(칼라시리스)을 입었으며, 가슴을 노출하거나 투명한 옷을 입는 것에 대한 사회적 금기가 적었습니다.
조선시대 여자의 경우
법적 권리: 중기 이후 성리학이 심화되며 "출가외인", "칠거지악" 등의 굴레에 갇혔습니다. 게다가 사회 활동은 극도로 제한되었으며, 이혼은 당연히 불가능했으며 남편이 죽으면 재혼조차 금기시되었습니다. 게다가 여성은 외출조차 불가능했습니다.
여성의 삶, 자유, 행복을 기준으로 한다면 "고대 이집트"가 조선 따위보다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살기 좋았습니다.
5) 얼마나 평화로웠을까?
기원전~고대 이집트 왕국의 평화
기원전~고대 이집트 왕국은 동부와 서부가 거대한 사막으로 막혀 있고, 북부는 바다, 남부는 폭포(제1~6단)로 막혀 있는 천혜의 요새였습니다. 이로 인해 외세의 침입 걱정 없이 수천 년간 고유의 문화를 유지했습니다.
고대 이집트 왕국이 이렇게 평화 선호의 이유는 종교적 관점이 많지요. 이집트인은 "이집트 땅에서 죽어 미라가 되어야만 부활하여 내세(두아트)로 갈 수 있다"고 굳게 믿었습니다.
외국에서 전쟁하다 객사하여 시신이 훼손되거나 이집트 흙에 묻히지 못하는 것은 영혼의 소멸을 의미하는 끔찍한 공포였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밖으로 나가기 보다는 방어와 내부의 안정을 훨씬 선호했어요.
이집트 역사는 3000년입니다. 중간기(혼란기)를 제외하더라도 평화로웠던 기간이 조선 왕조 전체 기간(500년)보다 훨씬 길어요.
조선시대의 경우
조선은 건국 직후에는 전쟁, 내전, 군부 쿠데타가 빈번했다가 잠시 소강 상태에 들어갔다가 중기에 임진왜란, 병자호란으로 대전쟁들이 발발 후에는 다시 평화기에 접어드는 등이었지만 이집트보다는 전쟁기간이 많았습니다.
6) 기원전~고대 이집트 농부와 여성의 평화로운 하루(가상 시나리오)
도널드 P. 라이언의 "24시간으로 보는 고대 이집트"와 고고학적 사실을 기반으로 재구성한 하루입니다.
오전 6시 기상과 아침 식사
나일강변의 흙벽돌 집에서 농부와 그의 아내가 일어납니다. 아침 식사는 갓 구운 엠머 밀 빵과 양파, 그리고 아침부터 걸러낸 맥주 1잔입니다. 고대 이집트에서 맥주는 술이라기보다 "마시는 빵"과 같은 필수 영양공급원입니다. 자녀들은 강가에서 발가벗고 뛰어놉니다.
오전 9시 노동과 풍요
이집트인 남편은 논밭으로 나갑니다. 나일강의 물이 썰물을 하자 검은 흙은 너무나 비옥해서 씨만 뿌려도 작물이 자랍니다. 소 2마리가 끄는 쟁기로 밭을 갈며 노동요를 부릅니다. 노동은 고되지만 감독관이 와서 점심으로 먹을 빵과 고기, 맥주를 넉넉히 지급합니다.
아내 메리트는 시장에 갑니다. 그녀는 직접 짠 리넨 천을 가지고 나가 향유(perfume oil)와 화장품(콜, Kohl)으로 물물교환합니다. 상인들과 흥정하는 목소리는 매혹적이에요.
오후 3시 휴식과 위생
고된 노동을 마치고 나일강에서 벌거 벗고 목욕을 합니다. 이집트인은 지구상에서 가장 깨끗한 민족 가운데 하나였습니다. 남녀 모두 몸의 털을 깎고, 향유를 발라 피부를 보호하고 냄새는 자취를 감췄습니다. 눈에는 공작석 가루로 만든 아이라인(콜)을 그려 눈병을 예방하고 미적 아름다움을 뽐냅니다.
오후 7 저녁과 성적 쾌락
집 지붕(테라스)에 온 가족이 모입니다. 시원한 강바람을 맞으며 생선 구이와 부추, 마늘을 곁들인 저녁을 먹습니다. 이웃집에서 음악 소리(하프와 류트)가 들려옵니다. 내일은 "아문 신의 축제"가 있는 날이라 휴일입니다. 부부는 맥주를 마시며 세네트(Senet) 보드게임을 즐깁니다. "당신을 사랑하는 것은 내 생명과 같다"는 사랑의 밀어를 속삭이며 부부는 억압 없는 자유로운 성행위의 밤을 보냅니다.
7) 어디가 더 살기 좋았는가?
"평화, 쾌락, 먹을거리, 여성의 삶, 복지*를 종합하여 판단할 경우 어디가 더 살기 좋았을지 답은 명확합니다.
2. 삶의 즐거움(쾌락): 조선은 보수적이고 엄격한 유교 규율로 인해 사회가 굉장히 차갑고 경직적이었는데, 이에 반대로 고대 이집트 왕국은 현세의 즐거움을 긍정하고 노래, 춤, 성(Sex), 화장을 사랑하는 문화였습니다.
3. 여성과 약자: 고대 이집트 왕국에서 여성은 남성과 동등한 법적 권리를 누렸던 인류 역사상에서도 꽤 높았던 남녀평등 사회였고 노약자와 병자에 대한 국가적 복지 케어 시스템(마아트)이 굉장히 잘 되어있었습니다.
4. 평화의 지속성: 고대 이집트는 지리적 이점으로 인해 수천 년간 외세의 대규모 침입 없이 고유의 문화를 평화롭게 향유했습니다.
조선은 군사 기술, 정치 기술, 화약 기술력, 문명력과 행정력, 기록 문화가 굉장히 강했고 체계적이었으며 철광석이 굉장히 많았지만 그외의 자원은 턱없이 부족했으며 가난했고 고리대금없이 성행했으며, 세계적으로도 가장 보수적으로 성을 억압하고 탄압하는 유교 성리학 사상으로 인해 여성들은 연애는커녕 바깥 외출조차 불가능했으며, 가뭄과 기근이 잦았고 고대 이집트 왕국보다 평화기가 짧았던데 반해, "고대 이집트 왕국"은 인류 역사상 가장 오랫동안 가장 풍요롭고, 당시 기준으로도 그리도 현재 기준으로도 꽤나 자유롭고 진보적이며 여성들이 개방적인 삶을 누렸던 "지상 낙원"에 가까운 문명이었습니다.